임진왜란은 16세기 말 동북아 판도를 바꾼 국제전쟁이었다. 그런 만큼 전쟁이 끝난 뒤 관계를 회복하는 일 역시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였다.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승려인 유정이 사절단 대표로 뽑힌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승병장이기도 했지만 그에 대한 일본 내 평판에 기인한 바가 컸다. 유정은 전란 초기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4차례 만나는 과정에서 명과 왜의 ‘조선 분할 통치’ 음모를 알아채 조정에 보고한 공로도 세웠다. 그러면서 일본 진영에서 보여준 당당한 처신과 인품으로 일본의 호감을 샀다. 당대의 한 시인은 “우리나라에 3정승이 있다고 말하지 마라. 나라의 안위가 모두 한 승려의 귀환에 달렸다”는 말로 그의 일본행에 대한 조선의 기대를 표현했다. 이 총리처럼 유정도 왜국으로부터 신뢰받는 발신자였던 셈이다.
지금은 유정이 조선과 왜국 간 국교 재개를 이끌었다는 평가가 역사적으로 굳어져 있다. 그러나 1604년 도일하는 유정에게 당대 조정이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왜에 대한 정탐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왜국을 장악하고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강화 의지와 일본 내 정치적 위상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강화 교섭은 그다음이었다. 하지만 유정은 쓰시마를 거쳐 왜의 수도인 교토에 모두 4개월간 머물며 정탐은 물론 강화 협상까지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도쿠가와와는 두 차례 면담했다. 나머지 시간은 시와 붓글씨로 승려, 관료들과 교유했다. 소프트파워를 이용해 일본의 호감을 산 것이다. 결국 이런 교유를 통해 도쿠가와 막부와 의견을 교환한 끝에 수교 재개 원칙에 합의하고 포로 송환도 관철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 한국의 차기 대선 주자 선호도 선두를 달리는 이 총리에 대한 일본의 관심도 그에 못지않을 것이다.
하지만 유정의 귀국 후 조선과 왜국 간 수교가 금세 이뤄진 것은 아니다. 이후 2년 가까운 곡절을 겪고서야 조선통신사가 탄 배가 왜국으로 가면서 공식적으로 수교가 이뤄졌다. 이 총리 방일로 한·일 갈등이 곧 풀리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이 총리가 당장 해야 할 일은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 중심은 징용 배상금 현금화를 위한 일본 기업 재산의 몰수와 다음달 발효되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 조치의 시행이다. 두 사안이 현실화할 경우 한·일관계는 물론 한·미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 가능성이 높다. 한·일 갈등을 풀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국내 기업으로 하여금 선제적으로 배상금을 지불토록 함으로써 일본 기업 자산에 대한 몰수를 해결하는 것도 그중 하나이다. 거기에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정이 협상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상당한 재량을 갖고 있었던 덕분이다. 유정은 ‘공식적 임무를 띤 비공식 사절’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유연하고 담대하게 협상에 임했다. 유정과 같은 접근이 이 총리에게도 필요하다. 2박3일 동안 일본 정·재계 인사들을 두루 만나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아베 총리의 속마음도 듣고 와야 한다. 그러려면 이 총리가 재량을 갖고 협상할 수 있어야 한다. 유정의 품에 국서가 없었던 것처럼 문재인 대통령도 친서를 보내는 것보다 재량권을 주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지금 한·일은 임진왜란처럼 7년 동안 전쟁을 한 사이가 아니다. 한·일 양국 모두 이 총리의 방일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유정의 방일 때와 가장 다른 점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대조선 강화 의지가 분명했지만 아베 총리의 관계개선 의지는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7년 전란으로 악화될 대로 악화된 양국 간 화해를 위해 현해탄을 건너던 유정의 결의와 전략을 이 총리는 새길 필요가 있다.
*하우봉 전북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논문 ‘임란 후 국교재개기 사명당 유정의 강화활동’(역사학보 173집, 2002)을 참조함.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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