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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영화리뷰] 스크린 속 `82년생 김지영`…여성의 시간을 응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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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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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출신 영화감독 샹탈 아케르만의 '잔느 딜망'은 아들을 키우는 매춘여성 이야기를 담는다. 자극적으로 다룰 수 있을 설정이지만 카메라는 주인공이 아들을 먹이고, 요리와 청소를 하는 일상을 담담하게 따라간다. 그가 감자 깎는 모습을 수분간 비추는 롱테이크 쇼트는 이 영화를 특징짓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여성의 시간은 절대 사소하거나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는 선언이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누적 판매 100만부를 돌파하며 이미 충분히 많은 사람이 읽은 베스트셀러를 굳이 영화화하는 의의 말이다. 카메라는 김지영(정유미)이 빨래를 삶고 아이 기저귀를 갈며 집안일을 할 때나 공원에서 멍하니 앉아 있거나 베란다에서 하루의 화를 삭이는 모습까지 놓치지 않고 응시한다. 카페에 잠깐 쉬러 나왔다가 "맘충" 소리를 듣는 김지영 역시 24시간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주요 소재는 빙의다. 아이를 낳고 직장을 그만둔 김지영은 이따금씩 자신의 엄마나 할머니가 빙의한 듯한 모습을 보이며 남편 대현(공유)을 걱정시킨다. 명절에 혼자서 주방 일을 하다가 시어머니를 향해 "사부인, 저도 제 딸 보고 싶어요. 딸 오는 시간이면 제 딸도 보내주셔야죠"라고 친정엄마 입장이 돼 항의한다. 대현을 짝사랑했던 지영의 대학선배로 변해 지영을 옹호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빙의'는 화자를 1980년대생 김지영에서 전체 한국 여성으로 확장하는 장치인 셈이다. 빙의 이외에도 영화에는 여성이 일상에서 차별을 마주칠 때 짓는 표정이 담겨 있다. 여자화장실에 불법촬영 카메라가 설치됐단 사실을 발견했을 때, 능력 있는 여자 팀장이 남자 상사 앞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이후 "드세다"는 한마디로 정리될 때가 그렇다. 관객은 여러 한국 여성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차별과 배제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 작품이 재미있느냐는 각자가 살아온 시간에 따라 답이 갈릴 듯하다. 남자 주연 조폭 영화가 차고 넘쳤던 한국 영화계에서 히어로도 잔혹범죄 희생자도 아닌 평범한 여자 주인공의 일상을 따라간 작품이 상영된단 사실만으로 누군가에겐 충분히 위로와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소설에 비해 남편과 아버지, 남동생을 가능한 긍정적으로 바라보려 한 점도 눈에 띈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이번 영화는 남성 역시 가부장제의 피해자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며 "단순히 남성을 비난하기보다는 사회 구조적인 부분에 시선을 돌리게 하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반면, 비슷한 톤의 이야기를 병렬 배치하는 건 영화로서 이 작품이 갖는 약점이다. 꽉 짜인 플롯을 기대하는 관객이라면 이 작품의 서사가 같은 자리에서 맴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울 것이다. 가부장제를 냉소했던 소설과 달리 영화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곳곳에 삽입해 작품 말미에 공익광고 느낌이 나는 점도 호불호가 갈릴 부분이다.

원작자 조남주는 김지영을 연기한 정유미에 대해 "베스트 캐스팅"이라며 "이 역할에 정말 잘 어울리는 얼굴"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말처럼 1983년생 정유미는 '82년생 김지영'을 연기하기에 가장 적합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화려하기보단 현실적인 캐릭터로 분하며 친밀한 이미지를 쌓아온 그는 이번에도 감정을 억누르는 데 익숙한 김지영을 표현하기 위해 극도로 절제된 연기를 보여준다.

작품은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영화 평가 애플리케이션 왓챠와 포털사이트 다음의 '82년생 김지영' 평점에 벌써부터 최하점을 주는 네티즌이 몰리고 있다. 정유미는 주연으로 캐스팅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악플 테러에 시달리기도 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소설의 젠더 갈등이 영화에도 옮겨 붙었다. '캡틴 마블'이 그랬듯 별점 테러는 흥행을 도와주는 불쏘시개가 될 것"이라며 "극단적 반대 행위는 오히려 결집 효과를 낳기 때문에 제작진과 홍보팀이 흥행을 위해 활용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김효정 영화평론가는 "3, 4년 전에 독립영화에서 붐을 일으킨 페미니즘 메시지가 이제 상업영화로 넘어오고 있는 것"이라며 "아직 페미니즘적인 영화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관객이 많지만, 제작·상영 편수가 늘어나면 결국 없어질 문제"라고 예상했다. '82년생 김지영'의 손익분기점은 160만명이며 오는 23일 개봉한다. 12세 이상 관람가.

[박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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