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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아이들에겐 놀이가 ‘밥’이고 ‘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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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제6회 놀이의 날’ 현장 취재

“친구야 놀자”가 사라진 골목

학원 생활·숙제로 놀 시간 부족

놀이의 상징 ‘골목 문화’ 없어져

관계맷집·사회성 길러주는 게 놀이

노는 것은 시간 낭비 아닌 ‘권리’

“놀 권리는 공공 영역에서 보장해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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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토요일 오후 1시 서울 동작구에 있는 보라매공원 잔디광장. 초록빛 드넓은 광장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해사한 웃음을 머금고 이리저리 뛰어놀면서 넘어지기도 하고, 다시 일어나 친구와 엉겨 붙어 “이번엔 상자로 기차를 만들자!”며 저쪽 멀리 뛰어갔다. 함께 온 부모들도 옷에 흙 좀 묻으면 어떠냐며 놀이에 동참했다.

어떻게 노는지 궁금해 따라가 봤더니 처음 보는 아이들과 금세 기찻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주위에 있던 신문지를 돌돌 말아 이어서 그럴싸한 철로를 놓았다. 무지갯빛 크레파스로 색칠한 상자를 세우고 이어 붙여 만든 역 이름은 ‘상상역’. 아이들은 구멍 뚫린 상자를 기차인 듯 뒤집어쓰고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신나게 달렸다. 순식간에 잔디밭 위를 달리는 상상열차가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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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이 활동가가 알려주는 ‘사방치기’

장소를 옮겨 둘러보니 이번에는 사방치기에 푹 빠진 아이들이 보였다.

“선생님, 이럴 땐 ‘하늘’로 어떻게 가요?” 놀이 규칙을 물어가며 바닥에 분필로 적힌 숫자를 따라가고 있었다. 재미있어 보였는지 그 옆에 있던 아이들도 까만 아스팔트 위에 흰 분필로 네모 칸을 쓱쓱 그려나갔다. 놀이에 필요한 작은 돌멩이 하나를 마련한 뒤, 네다섯명의 아이들은 마주 보며 웃었다. “가위, 바위, 보!” 새로운 골목 놀이를 접하는 아이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났다.

‘제6회 놀이의 날’이 열린 이날, 비영리법인 시민단체인 ‘놀이하는 사람들’(이하 놀사)에서 전래 놀이를 전수하는 ‘놀이 활동가’들도 만날 수 있었다. 놀사는 2010년 7월 서울 동작구 ‘두근두근 놀이마당’(이하 놀이마당)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전래 놀이, 골목 놀이를 비롯한 다양한 놀 거리를 발굴하면서 ‘놀이 보따리 웃음보따리’ 등 여러 사업을 하고 있다. 놀이마당은 현재 전국 15개 지역에서 매달 1회 열린다. 어린이·청소년이라면 누구나 놀이에 참여할 수 있다.

전국에서 모인 놀이 활동가들은 이날 아이들은 물론 함께 참여한 양육자에게 사방치기, 딱지치기, 도토리 팽이, 굴렁쇠 놀이, 숲 밧줄 놀이 등을 설명해주고 ‘신나는 놀이 한판’을 벌였다.

1989년 11월20일 유엔이 채택한 어린이 권리조약인 ‘유엔아동권리협약’(이하 협약) 31조에는 ‘우리는 충분히 쉬고 놀 권리가 있다’는 항목이 있다. 이 협약은 한국을 포함한 세계 192개 나라가 합의한 것이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이하 위원회)는 놀이를 ‘어린이 스스로 조절하고 시도하는 행동, 활동,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위원회는 놀이의 조건 중 하나로 자발성을 강조한다. 목표를 설정하지 않고 비생산적인 활동을 하면서 얻는 즐거움이 놀이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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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센터 데려가는 게 놀아주는 걸까

‘노는 것은 시간 낭비’ ‘놀게 놔두기보다는 체험학습이 좋다’는 양육자들의 편견이 아이들의 놀 권리를 제한한다. 놀이는 일회성 행사나 체험학습이 아닌 일상에서 반복되고 지속하는 것인데도 양육자들은 항상 ‘내가 아이에게 무언가 좋은 체험을 시켜줘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린다.

이런 압박감은 이내 죄책감으로 이어진다. 문화센터, 미술관, 박람회 등 어딘가로 데려가지 않으면 아이와 놀아주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운 것이다. 한데 부모로서 아이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동네 놀이터나 모래 바닥에서 아이 스스로 손과 발을 움직여보며 ‘내가 아닌 다른 존재들’과 어울리게 하는 게 진짜 놀이다.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주어진 시공간에서 모험하고 도전해본다. 자발성을 키우고 창의력을 높일 수 있다. 문화센터 선생님이 알려주는 대로 놀 수도 있지만, ‘놀이’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몸과 생각을 영글게 한다.

때로는 다치기도 하고 부딪쳐보면서 또래와의 관계를 지속해서 맺어나간다. 갈등 상황이 생기면 그 나름대로 관계의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다. 팀을 나눠 땀 흘리며 뛰어다닌 아이들은 타인의 생각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며 협력의 힘을 배운다. 말 그대로 인생 공부인 것이다.

공교육 현장에 있는 초·중등 교사들은 “요즘 아이들이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을 참 힘들어한다. 지속적인 관계 맺기에 실패하거나 쉬는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아이들도 많다”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놀이가 그 대안이라고 강조한다.

놀사의 김회님 대표(활동명 얼씨구)는 “놀다가 다른 친구와의 관계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 회피하지 않고 풀어나가는 능력을 ‘관계의 맷집’이라고 한다”며 “관계의 맷집을 키우는 힘뿐 아니라 상황에 맞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뒤 조절할 줄 알고, 타인을 배려하는 아이로 성장시키는 힘이 놀이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제부터라도 ‘놀지 말고 공부해라’와 같은 말 대신 ‘잘 노는 걸 보니 잘 크겠구나’ ‘잘 노는 걸 보니 사회성이 좋겠구나’라고 아이들에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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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에선 국가 차원에서 놀이 장려해

영국의 경우 국가적 차원에서 놀이를 장려하고 확산시키기 위해 2008년부터 ‘국가놀이정책(Play Strategy)’을 시행해왔다. 모든 주거 지역에 어린이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안전한 놀이 장소를 만들고, 공공장소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취지다.

2010년에는 ‘놀이 친화 정부’(A Play Friendly Country)를 앞세워 아동가족법 제2조에 어린이가 노는 것에 관한 항목을 명시했다. 지방정부가 의무적으로 아이들이 충분히 놀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3년마다 ‘아동 놀이 기회의 충분성’을 정부 차원에서 평가·관리하니 아이들의 놀이 기회가 양적으로도 충분하고, 질적으로도 높은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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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역시 ‘여가정책’에서 어린이·청소년의 놀이를 지원한다. 지역별로 놀이터 관련 정보를 인터넷 누리집에 올리고, 다양한 자료를 모든 양육자에게 제공하고 있다. 현재 베를린시에 있는 1850여개의 공공 놀이터 정보 역시 모두 제공된다.

일본도 ‘도시 환경 조성이 어린이의 놀 권리를 박탈했다’는 인식 아래 약 30년 전부터 ‘플레이 파크’를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학교 등에서 금지한 웅덩이 파기, 모닥불 놀이, 나무 타기 등 자유로운 놀이가 가능하다. 특히 일본 가와사키시는 어린이의 놀 권리를 조례로 제정했다. 놀이터마다 놀이 활동가가 상주하면서 아이들의 놀이를 지원하고, 창의적인 놀잇감을 만들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김명순 연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놀이는 어린이들의 창의성, 즐거움, 탄력성 회복 등의 뿌리가 되기 때문에 사회적 책무로서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며 “아동 및 교육 정책 결정자, 교사, 양육자, 지역 주민 등 모두가 아이들의 ‘놀이’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어린이를 위한 장·단기적 교육 정책을 마련하듯이 아동 권리적 측면에서 놀 권리를 확보하고 ‘국가놀이정책’을 수립, 실행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친구와 관계를 맺고 때로는 갈등 상황에 놓이는 것도 아이들이 배우고 익혀야 할 삶의 한 과정이다. 놀면서 협동하고, 싸우고 화해한 경험이 많은 아이일수록 어른이 된 뒤 관계에 어려움이 생겨도 헤쳐 나갈 수 있다. 놀사 제주 지역 놀이 활동가인 김현순씨는 “많이 놀게 해줘야 건강하고 자존감 있는 아이로 자랄 수 있다. 놀이는 관계의 맷집을 키우는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김지윤 기자 kimjy13@hani.co.kr

“‘논다’는 것은 ‘함께한다’는 뜻입니다”

인터뷰‘놀이하는 사람들’ 김회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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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동안 ‘놀이’로만 아이들을 만나온 사람이 있다. 1998년부터 국악 놀이, 표현예술치료, 연극 놀이, 전래 놀이 등으로 놀이의 중요성을 전파해왔다. 놀이에 청춘을 바쳤다. 사단법인 ‘놀이하는 사람들’(이하 놀사)의 김회님(활동명 얼씨구) 대표 이야기다. 그는 지난해 놀이 활동가, 놀이 전문가로 살아온 시간을 <잘 노는 애 안 노는 애 못 노는 애>라는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아래는 놀이의 중요성에 관한 김 대표와의 일문일답이다.

■ 양육자들은 여전히 ‘노는 것은 권리’라고 하면 낯설어 한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놀 줄’ 모른다.(웃음) 지난 20여년 동안 아이들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건 충분히 노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 아이와 주변 아이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에 관심을 가졌고,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놀이로 커나간다는 진리를 몸과 마음으로 깨달았다. 뜻을 함께하는 분들과 놀사를 꾸려가고 있다. ‘놀 권리’는 유엔아동권리협약 31조에 명시돼 있다. 교육받을 권리, 건강하게 자랄 권리 못지않게 중요한 영역이 ‘놀이’라는 이야기다. 한국도 국가 차원에서 ‘놀이 전담 부서’를 만들어 ‘놀 권리’에 관한 인식을 재정립·확산해야 한다고 본다.”

■ 놀이에는 어떤 속성이 있나?

“놀이하다 보면 아이들 사이에서 은근한 권력관계가 드러난다. 그 반에서 누가 인기가 많은지, 누가 운동을 잘하는지, 누가 가장 센지 금세 알 수 있다. 심지어 그 반에서 가장 센 아이가 수업에 협조적이지 않으면 나머지 아이들이 그 아이를 따라가기도 한다. 그 일상의 권력을 놀이 속에서 깰 때 아이들은 희열을 느낀다. 놀이라는 비일상에서나마 강자를 이겨보는 경험이 얼마나 짜릿하겠는가. 술래가 된 아이가 학교 대표 육상선수에게 달리기 ‘도전’을 해볼 수 있는 것도 놀이를 통해서다. 이처럼 일상에서는 하기 힘든 도전과 모험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놀이가 가진 매력 아닐까.”

■ 노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인식이 있다.

“요즘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놀이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다칠 경우 양육자에게서 항의와 민원이 들어올까봐 꺼리기 때문이다. 놀이 수업에서조차 아이들이 도전하고 모험하지 못하게 한다. 가정에서는 어떨까? 학교와 집, 학원을 오가며 시간에 쫓기느라 아이들이 놀 시간이 없다. 부모들은 아이가 놀이하는 시간을 공부하는 시간보다 가치 없다고 여긴다. ‘놀지 말고 공부해라. 만날 놀기만 하니까 그 모양이지’라는 말은 놀이가 공부의 반대어로, 놀면 실패한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한데 아이들은 놀면서 성장하고 자아상을 확립해간다. 상호작용하며 대화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상황에 맞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뒤 조절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아이로 성장시키는 힘이 놀이에 있다고 믿는다.”

글·사진 김지윤 기자 kimjy1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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