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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시선]기회만 균등하면 평등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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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던 청년 노동자가 들어오는 지하철을 피하지 못해 사망했다. 안전수칙을 지키면 저성과자가 되는 해괴망측한 구조가 사고의 원인이었기에 사람들은 분노했다. 비용 절감을 위해 노동자의 목숨조차 효율성이라는 저울에 올라가는 사회가 어찌 상식적이겠는가. 게다가 청년의 가방에는 뜯지 못한 컵라면이 들어 있었다. 이걸 보고 평생 엘리트의 길을 걸어온 한 정치인이 이런 글을 남겼다. “가방 속에서 나온 컵라면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릅니다.”

경향신문

나는 고인을 추모하는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개인의 진심이 사회의 상식과 일치하진 않는다. 본인은 약자에게 동정심을 갖는 게 당연하다고 배웠겠지만, 이는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엘리트 교육을 충실히 수행한 결과일 뿐이다. 어떤 노동을 하더라도 안전할 수 있는 세상은 동정이 아닌 연대와 투쟁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엘리트 교육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완전한 평등은 불가능하다’는 전제로 개인의 경쟁력을 극도로 끌어올린다. 공부 열심히 안 하면 큰일 나니, 공부 열심히 해서 시궁창을 피하라는 주술만이 떠돌면 일하면서 죽지 않을 평등한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은 상시적으로 존재한다. 이런 차별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무리 상식을 찾아봤자 ‘형편 안 좋아서 공부를 못한’ 사람들을 딱하게 보는 걸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선한’ 엘리트들은 교육기회의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면서 기부도 하고 소외계층 자녀들의 학업을 도울 방법을 강구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엘리트 교육은 교육기회의 불평등을 해결하는 것만이 경쟁에 사회가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믿는다. 교육의 평등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하는 수준으로 해결된다는 믿음은 교육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차별적 요소를 차별이 아닌 것으로 이해하게끔 한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요즘에는 흑인들도 학교 다니는데 차별이 어디 있냐!’고 외치는 이유다. 교육은 개인의 출발선을 맞추는 것만으로 공정성이 보장될 수 없다. 모두가 학교를 다니고, 모두가 같은 과목을 배워서 평가를 받아도 개인의 경쟁력에 영향을 끼치는 수많은 변수를 완벽히 통제할 수 없다. 교사의 오늘내일 감정도 다르고 학생의 오전오후 심리도 천차만별이다. 개인을 흔드는 요소는 무수하다. 계층, 성별 등에 따른 세상의 선입견은 둘째 치더라도 가정사, 질병, 주변관계 등이 사람마다 동일한 상황일 수 없으니 흔들림도 각양각색이다. 그러니 교육 결과는 기회가 균등한들, 온전히 개인의 몫으로 규정될 수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한날한시에 철저한 감독하에 시험이 치러지는 것이 과정의 공정성 전부라고 생각한다. 성적으로 사람을 다르게 대하는 걸 부끄럽지 않다고 여기는 태도는 그게 정당하다는 확신이 있기에 가능하다. 시험 결과로 사람의 우열을 구분하면 그 껍데기에 따라 개인이 받는 칭찬의 빈도와 격려의 강도는 확연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 과정의 불공정이 ‘공부에 인생을 걸겠다’는 의지의 차이로 이어져 실제 성적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당연지사다.

‘남보다 성실했으니’ 1등은 박수받을 권리가 있고 ‘객관적인 노력의 증거’이기에 명문대 합격자 이름을 현수막에 적어 공교육 기관의 정문에 거는 걸 합당한 보상이라고 하면 그 끝에 무엇이 있겠는가. 1등이 아니어서 겪은 차별, 명문대 졸업장이 없어서 당한 혐오에 누군가가 아무리 분노해도 ‘공정한 시험 결과 아닌가?’라는 빈정거림이 일관되게 부유하는 작금의 사회는 시험만이 과정의 공정성을 대변하면서 부당한 편견이 어떻게 은폐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공정한 시험이 존재한다는 막연한 기대감은 기회와 과정이 평등할 수 있다는 착각을 거쳐 결과에 대해서는 토를 달지 말자는 차별의 씨앗을 만들 뿐이다.

오찬호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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