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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피해자 진술 ‘성인지 감수성’ 고려…‘안희정 위력’에 의한 성폭력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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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형 판결’ 확정 배경

경향신문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지난해 8월14일 성폭행 혐의 등에 대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서울서부지방법원을 나서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안희정 전 충남지사(54)에게 징역 3년6월을 확정한 9일 대법원 판결은 권력관계를 이용한 성관계를 범죄로 인정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일상에 광범위하게 퍼졌다는 점에서 판결의 파급효과가 클 것으로 보인다. 수직적·권력적 관계가 존재했다고 곧바로 성폭력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안 전 지사 측 주장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법원은 기존 여러 판례를 근거로 2심의 유죄 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는 기존 판례를 따르더라도 안 전 지사의 행위는 성폭력으로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허위로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할 만한 동기나 이유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피해자 진술 신빙성을 특별한 이유 없이 함부로 배척해서는 안된다’ ‘위력이란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세력을 말하고, 위력으로써 간음했는지는 행위자의 지위나 권세, 피해자와의 관계 같은 제반 사정을 종합해야 한다’ 같은 판례들이다. 대법원은 이런 판례들을 인용하며 “이 같은 법리는 새로운 판시가 아니라 이미 반복적으로 판시돼온 것”이라며 “2심은 물론 1심 역시 그 판단의 전제로 삼고 있는 확립된 법리”라고 설명했다. 1·2심에서 유무죄 판단이 엇갈린 대목은 ‘위력 행사’ 여부다. 형법 303조는 “업무·고용 기타 관계로 인해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해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를 처벌한다”고 규정하지만, 법원은 위력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미성년자·장애인 같은 상대적 약자가 피해자일 때 강간죄 성립 요건이 되는 ‘폭행·협박’에 준해 위력을 해석하는 게 문제라는 비판을 받았다.

“자유의사 제압하는 위력

행위자 지위 등 종합해야”


1·2심은 폭행·협박뿐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정치적 지위나 권세가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에서 말하는 ‘위력’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판단이 동일했다. 1심은 피해자 김지은씨가 성관계에 저항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등 이유로 위력이 행사되지 않았다고 했다. 2017년 7월30일 러시아 호텔 간음 혐의와 관련해 “김씨가 단순히 방을 나가거나 안 전 지사의 접근을 막는 손짓을 하는 등의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안 전 지사가 위력적 분위기를 만들었거나 물리력을 행사한 사정도 보이지 않는다”는 판단이 대표적이다. 위력 행사 기준을 폭행·협박과 유사하게 높게 본 것이다.

안 전 지사 측도 대법원에 상고하면서 위력은 단순히 상하관계를 뜻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에서 피해자에게 간음행위를 의사에 반해 받아들이게 만드는 ‘의사 강제의 수단’이라고 했다. 미성년자·장애인 피해자와 달리 성인 피해자에 대한 성폭력에서 ‘위력’은 더 엄격하게 봐야 한다고 했다.

2심은 안 전 지사의 지위·권세, 즉 무형적 위력이 김씨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더 나아가 2심은 유형적 위력도 있었다고 했다. 러시아 호텔 간음 혐의에 대해 1심은 “안 전 지사가 김씨를 안고 침대로 데려가 옷을 벗긴 것은 적극적 유형력”이라고 했다. 대법원은 2심 판단이 맞다고 판단했다. “위력이란 유형적이든 무형적이든 묻지 않으므로 폭행·협박뿐 아니라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판례를 언급하며 안 전 지사가 위력으로 간음했다고 인정했다.

정혜선 변호사는 “현실의 위력은 선명하게 드러나거나 잘 보이지 않는다”며 “노골적인 갑질이나 폭력적인 행태를 띠지 않고도 때로는 점잖게, 때로는 의식할 수도 없는 공기처럼 작동해 피해자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방해하고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사건이 단적으로 보여줬다”고 말했다.

김씨 진술에 신빙성이 있느냐도 쟁점이었다. 김씨 진술 외에 증거가 많지 않았다. 1심은 김씨가 피해자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면서 김씨 진술을 배척했다. 대법원은 이를 두고도 기존 판례를 언급했다. “법원이 성폭력 사건을 심리할 때는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는 지난해 10월 판결이다.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성폭력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정이나 가해자와의 관계 및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성폭력 피해자는 피해 직후 공포심에 억눌려 자유롭게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이른바 ‘피해자다움’을 부정한 판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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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2심이 김씨 진술을 믿을 만하다고 본 데 잘못이 없다고 대법원은 수긍했다. 2심은 “수행비서로서의 업무 수행을 성실히 했다고 해 피해자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대법원이 말하는 성인지 감수성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아 혼란을 준다고 지적한다.

“성폭력 피해자 대처양상

상황 따라 달라질 수 있어”

기존 판례들 그대로 인용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성인지 감수성은 피해자 진술만을 믿겠다는 게 아니다”라며 “성폭력 피해자는 아무것도 못하고 취약한 위치에 있어야 된다는 편견을 제거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 부연구위원은 “편견 때문에 남성 피해자를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성인지 감수성을 적용해야 한다”며 “오히려 합리적이고 중립적인 관점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대법원은 “형사재판에 있어서 유죄로 인정하기 위한 심증 형성의 정도는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여야 하나, 이는 모든 가능한 의심을 배제할 정도에 이를 것까지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판례 내용도 짚었다.

다만 대법원은 2017년 8월 도지사 집무실에서 강제추행한 혐의에 대해서는 2심과 마찬가지로 무죄로 확정했다. 김씨 진술에 의하더라도 구체적인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게 2심 판단이었다. 안 전 지사는 2017년 7월~2018년 2월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4건, 강제추행 5건,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성폭력특례법 위반) 1건을 저지른 혐의로 지난해 4월11일 기소됐다.

이혜리·유설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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