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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1 (토)

[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솔잎혹파리 피해 복구의 좋은 사례, 원대리 자작나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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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인제군 원대리에는 남한 내 최대의 자작나무 숲이 있습니다. ‘1박2일’에 이어 ‘연애의 맛’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 선남선녀 커플이 찾아와 데이트를 즐기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곳입니다.

조선비즈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



최근에는 ‘캠핑클럽’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공개한, 1세대 아이돌 그룹 ‘핑클’의 티저 영상에도 나왔습니다. ‘핀란드의 맑은 공기를 대한민국에서’라는 문구와 함께 원대리 자작나무 숲이 소개되면서 관심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 정도면 한 번쯤 방문해 볼 이유가 충분하다 싶어 시간을 내보았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별다른 사전 지식 없이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자연적으로 이뤄진 숲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조림한 숲이라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은 올봄에도 무작정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산불조심 기간이 풀리지 않은 5월 초라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틀만 늦게 왔어도 되는 건데 안타깝다고 했습니다. 새잎이 푸르게 돋아나면 산불이 나도 확산이 더디므로 그제야 산불조심 기간을 푼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통 5월 15일로 잡는 것이고요. 올해는 5월 4일부터 조기 개방할 예정이었는데 제가 이틀 일찍 오는 바람에 들여 보내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나 이번이나 준비 없이 간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도가 그려진 안내판은 대충 보고 지나쳤습니다. 두 시간 반 정도 걸리고 왕복 세 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안내자의 말도 한 귀로 흘려버렸습니다.

어차피 수박 겉핥기 식으로 슬쩍 들어갔다 얼른 나올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TV프로그램에서 본 것처럼 그리 멀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아침도 거른 채 어슬렁어슬렁 걸어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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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리 자작나무 숲 들머리



길 주변에는 자작나무보다 아까시나무(속칭 아카시아)나 물오리나무, 일본잎갈나무 같은 나무들이 자주 보였습니다. 사람이 심은 나무로 가득한 숲은 너무나도 인공적이어서 별로 반갑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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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듬성듬성 보이는 자작나무의 흰 껍질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아야 자작나무의 하얀 껍질이 고르지 못한 치열처럼 들쭉날쭉 보였습니다. 이런 숲이 아닌데 싶어서 안내판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작나무 숲은 입구에서 2.7㎞+1.1㎞=3.8㎞나 더 들어가야 있었습니다.

길 따라 조성된 게 아니었습니다. 그제야 배낭에서 포도즙 하나를 꺼내 먹었습니다. 어떻게든 공복을 잊고 싶었으나 포도즙 하나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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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숲 안내도



고픈 배를 쥐고 가다 갈림길에 이르러 바닥에 박힌 팻말이 하나 보였습니다. 200m 앞에 매점이 있으니 ‘힘 네라’는 안내판이었습니다. 맞춤법이 틀렸는데도 힘이 절로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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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리 자작나무숲 안에 있는 맞춤법이 틀린 안내 팻말. 어설퍼 보이는 말뚝과 글씨가 오히려 정겨웠다.



정말로 200m인지 모를 거리를 더 가니 매점이 나타났습니다. 자작나무 숲은 매점에서도 700m를 더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매점아주머니 말로는 ‘연애의 맛’ 팀은 정상까지 거의 다 차로 올라가서 촬영한 거라고 했습니다. 제가 걸어온 길(원대임도)의 반대편 방향(원정임도)에서 올라간 모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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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나타난 매점



컵라면 하나 시켜 시원한 그늘에 가서 먹으며 기운을 차렸습니다. 커플 손님이 오기에 얼른 그들에게 그늘 자리를 비켜준답시고 모자를 주워들고 일어섰습니다. 그 순간, 모자 속에 놓아둔 카메라가 의자 아래로 툭 떨어졌습니다.

불길했습니다. 집어 들어보니 24~70㎜렌즈 앞에 끼워놓은 CPL필터가 깨져 있었습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희뿌연 빛이 새어 들어오는 사진이 정말로 가슴 아프게 찍혔습니다.

다시 길을 재촉했습니다. 시원한 숲길을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작나무 숲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나무의 수보다 놀란 것은 높은 밀도에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리 꽂은 듯한 조밀한 자작나무 숲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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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밀하게 심어진 자작나무



거기서 사진을 한참 찍고 길을 더 가니 거기는 더 대단했습니다. 어지간한 광각렌즈로는 담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드넓은 자작나무 숲에 그대로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아름답지만 단풍이 드는 가을에 오면 좋겠구나 싶었습니다. 먼 길을 걸어온 수고에 대한 보상은 충분했습니다. 다만, 깨먹은 렌즈 필터는 어떤 풍경으로도 보상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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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이어지며 나타나는 자작나무 숲



조금 더 가니 광장 같은 곳이 나타났습니다. 그곳이 바로 촬영지 같았습니다. 함께 온 사람들마다 기념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 밀집 지역의 자작나무만 해도 41만 그루 정도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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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프로그램 촬영지의 자작나무



자작나무를 그렇게 빽빽하게 심은 데는 아마도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원래 소나무가 많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솔잎혹파리 피해가 심각해지는 바람에 모두 베어내고 대신 자작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1989년부터 1996년에 걸쳐 6㏊에 약 70만 그루의 자작나무를 심었는데, 병충해 지역을 복구한 곳이다 보니 처음에 심을 때 듬성듬성 심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빠른 피복 효과를 보기 위해 조밀하게 심었을 테고, 그것이 지금의 엄청난 숲을 이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숲에 타이틀 하나 없을 리 없습니다.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이라 이름 붙여진 이 숲은 2017년 ‘제17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우수상)을 수상했다고 합니다.

인공적으로 조림한 곳이지만 큰 면적에 자작나무 단순림으로 구성되어 경관의 가치가 우수합니다. 근처에는 공연장으로 조성된 곳도 있어서 다양한 행사를 열 수 있어 보였습니다.

돌아가는 길은 원대임도 코스로 가기로 했습니다. 내리막이라 시간이 적게 걸리지만 땡볕이라 걷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30분이면 내려간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이 걸려서 1시간 정도 소요됐습니다. 그리로 올라온다면 경사 때문에 힘들 수 있어 보입니다. 그러니 제가 다녀온 대로 갈 때는 왼쪽의 원정임도로 갔다가 돌아올 때는 원대임도로 내려오는 코스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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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숲으로 연결된 원대임도. 내려갈 때는 이 길을 택했다.



자작나무는 원래 북방문화권을 대표하는 나무로, 남한에는 자생지가 없습니다. 남한에서 자작나무를 보았다면 그건 모두 심은 것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원대리의 자작나무도 심은 것이 분명하지만 솔잎혹파리 피해 지역을 멋지게 복구한 사례로, 타의 모범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정말 잘한 일이고, 잘한 일은 칭찬해줘야 마땅합니다. 제가 아는 유일한 핀란드어로 칭찬해 주고 싶습니다. 휘바휘바!

이동혁 풀꽃나무칼럼니스트(freebowl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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