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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1 (토)

[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흔히 보이는 쉬나무, 암수딴그루? 양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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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나무는 회화나무와 함께 옛날에 선비가 이사 갈 때 씨를 가지고 갔던 나무입니다. 회화나무는 곁에 두고 보면서 학자의 기상을 기르기 위함에 있었고, 쉬나무는 씨에서 짠 기름으로 불을 밝혀 글을 읽기 위해서였습니다.

정신 수양에 필요한 나무가 회화나무였다면, 실생활에 필요한 나무는 쉬나무였던 것입니다. 석유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동백나무나 때죽나무와 함께 기름을 얻어내는 중요한 나무로 전국에 많이 심어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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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쉬나무



이름은 중국의 한약재인 오수유와 열매가 비슷해서 수유나무라고 하다가 쉬나무로 줄어든 것입니다. 큰 특징이 없어 쉬이 알아보기 어려운 게 쉬나무지만, 귤과 같은 운향과의 나무이니 잎을 잘라 특유의 냄새가 나는지 확인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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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쉬나무의 씨로 기름을 짜서 썼다



짙은 건 아니고 비교적 옅은 귤 향이 납니다. 잎 뒷면 맥겨드랑이에 흰 털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쉬나무를 판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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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나무는 잎 뒷면 맥겨드랑이에 흰 털이 있다



서울에는 가죽나무만큼이나 쉬나무가 많이 퍼져 자랍니다. 글공부하던 선비뿐 아니라 서민이나 왕족들도 밤에 불을 밝히려면 기름이 필요했을 테니 주변 산지에 쉬나무를 심었을 것입니다.

어느 분이 쓴 ‘남산 위의 저 쉬나무’라는 멋진 글에서는 교육열 높았던 남산골 샌님들이 자녀의 면학을 위해 심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남산의 목멱산 봉수대도 쉬나무를 한양 땅에 퍼뜨리는 데 한몫했을 겁니다. 목멱산은 남산의 옛 이름입니다. 봉수대는 나라에 일이 생겼을 때 밤에는 봉화를, 낮에는 연기를 피워 위급한 상황을 전국 각지로 전하는 데 이용한 통신수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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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N서울타워 주변에 있는 봉수대




다섯 개의 봉수대가 있는데, 불을 피워 올린 개수가 많을수록 위급한 상황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 불을 지피는 데 기름이 필요했을 것이므로 봉수대 주변에 쉬나무를 심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태조 이성계 때부터 이용한 봉수대라고 하니 아마 그 시기에 심어진 쉬나무가 서울 곳곳에 씨를 뿌려댔을 것입니다. 개화기 때 남산의 N서울타워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황백색으로 핀 쉬나무가 매우 잘 드러나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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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서울타워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남산



쉬나무는 꽃의 성별에 대한 오해를 꼭 풀고 넘어가야 하는 나무입니다. 실은 어떤 블로거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게시글이 이 글을 쓰게 한 발단입니다.

그 블로거는 쉬나무가 암수딴그루라고 강조하면서 아마추어 식물 연구 동호인들도 다 아는 사실인데 식물도감을 출간했다는 프로라는 이들이 한결같이 쉬나무를 양성화로 설명한다며 동호인보다 미흡한 관찰 내용을 활자화했다고 비판합니다.

여의도공원에 나란히 서서 자라는 두 쉬나무가 암수라고 하면서 증거 사진까지 대대적으로 제시하며 써내려간 그 글이 제 얘기를 하는 것 같아 뜨끔했습니다.

쉬나무는 자료에 따라 양성화 나무로 소개하기도 하고 암수딴그루로 설명하기도 하는 혼란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양성화는 틀린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암수딴그루도 맞는 게 아닙니다.

일단 그 블로거의 게시글에 달린 댓글과 답글에서 재미있는 사실이 발견됩니다. 간혹 암그루의 꽃차례에 수꽃이 달리는 경우가 있더라는 어느 방문자의 댓글에 주인 블로거가 그렇다고 하면서 암꽃과 수꽃을 함께 사진으로 찍기 어려워 증명하기 어렵다고 답합니다.

그러면서 정확히 말하자면 쉬나무는 잡성주라고 하는 게 맞다면서 암꽃과 수꽃이 함께 핀 증거 사진을 찍는 대로 쉬나무는 잡성화를 갖는다고 적을 생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잡성주 또는 잡성화는 쉬나무에 적용해 쓸 수는 없는 용어입니다. 단성화로도 피고 양성화로도 피는 식물을 가리켜 잡성주 또는 잡성화라고 하는 건데, 쉬나무는 블로거 자신이 밝혔듯이 양성화를 피우는 나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신의 관찰 내용에 답이 나와 있는데, 결론을 엉뚱하게 내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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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나무의 수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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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나무의 암꽃



함께 근무하는 박사님께 알려드리니 뭔가 냄새가 난다고 하면서 논문을 검색해 보셨습니다. 그러더니 2006년에 이미 다른 나라에서 발표한 쉬나무 꽃의 성 체계에 관한 흥미로운 논문을 찾아 보여주셨습니다.

그 논문을 읽고 나니 쉬나무 꽃의 성별에 대한 그동안의 여러 의문이 한순간에 풀렸습니다. 좀 싱겁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쉬나무는 수꽃만 피는 수그루가 있고, 암꽃과 수꽃이 한 나무에 피는 암수한그루(자웅동주)가 따로 있습니다.

수꽃자웅동주딴그루라는 요상한 용어로 표현해야 하는 게 좀 어색하지만, 어쨌든 쉬나무는 암수딴그루가 절대 아닙니다. 아마추어들이 암꽃 피는 나무로 인식하는 것은 1차로 수꽃이 먼저 피었다가 지고 난 후 2차로 암꽃이 핀 것이므로 암그루가 아니라 암수한그루입니다.

2006년 논문에 따르면 수그루에 달리는 수꽃의 개화기간은 25~29일로 길지만, 암수한그루에 달리는 수꽃의 개화기간은 8~13일로 짧은 편이라고 합니다. 개화 시작 후 2주 정도만 관찰하면 수그루인지 암수한그루인지 판단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하지만 실제로 조사해 보니 우리나라 쉬나무의 사정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분포 지역이나 각 개체의 특성에 따라 개화기간이나 성별의 상태가 제각각이었습니다.

검증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논문을 토대로 여러 쉬나무를 몇 차례에 걸쳐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증거 사진만 찍어두면 되니까요.

일단 성동구의 서울숲으로 가보았습니다. 그곳에 암꽃이 피는 쉬나무가 있더라는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본 것이 11년 전입니다. 서울숲에서 숲해설가로 활동하던 분이 확실히 보고 해준 이야기이므로 틀리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때 제 눈에 보이는 건 수꽃뿐이었습니다. 제가 못 찾는 건가 싶어 아쉬웠으나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그 수꽃을 양성화겠거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수꽃이 피는 시기에만 가보았기에 후에 피어나는 암꽃을 보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올해 처음 방문한 7월 18일에는 역시나 모두 수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13일 후인 8월 31일에 가보았더니 맨 앞의 큰 나무만 계속 수꽃이 피는 수그루였고, 그 뒤쪽의 다섯 그루는 모두 암꽃으로 바뀌어 있거나 이미 열매 상태로 접어든 암수한그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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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숲의 쉬나무 중 사진에 보이는 맨 앞의 것만이 수그루다



남산 N서울타워 목멱산 봉수대 주변의 쉬나무는 약간 높은 곳이라 그런지 꽃이 늦게 피는 편이었습니다. 접근하기 어려워 성별을 정확히 관찰하기 어려우나, 수그루와 암수한그루가 골고루 섞여 있는 것 같았습니다.

등산로 중간쯤에 있는 잠두봉 포토아일랜드 주변의 쉬나무들도 마찬가지고요. 남산공원주차장 쪽에 홀로 서서 N서울타워를 올려다보고 있는 거대한 쉬나무는 확실하게 수꽃만 피는 수그루였습니다. 혹시 몰라 네 번째로 찾아가본 8월 8일에는 역시나 가지가 모두 빈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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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공원주차장 쪽의 거대한 쉬나무는 수그루다



블로거께서 알려준 여의도공원의 두 쉬나무도 찾아가 보았습니다. 말씀대로 왼쪽의 것은 수그루였으나, 오른쪽의 것은 암그루가 아닌 암수한그루였습니다. 그 암수한그루 나무는 7월 19일에 방문했을 때 벌써 서로 다른 가지에 암꽃과 수꽃을 달고 있었습니다.

하나의 꽃차례에서 암꽃과 수꽃이 함께 피어 있는 경우는 없지만 가지를 달리해서는 그렇게 수꽃과 암꽃의 교대 시기가 살짝 겹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건 다른 곳의 쉬나무에서도 관찰되는 현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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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공원의 쉬나무는 왼쪽의 것이 수그루, 오른쪽의 것이 암수한그루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탄도항 주변은 제가 아주 오래전부터 쉬나무의 꽃과 열매를 보아온 곳입니다. 그곳에 모여 자라는 여덟 그루의 크고 작은 쉬나무도 7월 19일 방문 때는 모두 수꽃만 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12일 후인 7월 31과 20일 후인 8월 8일 방문 때는 그중 네 그루가 수꽃에서 암꽃으로 바꿔 단 암수한그루였고, 나머지 네 그루는 계속 수꽃만 달리는 수그루였습니다. 네 그루의 암수한그루 중 세 그루는 해거리를 하는 건지 암꽃의 양이 상당히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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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시 탄도항 쪽의 쉬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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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수서역 인근 탄천변에 심어진 쉬나무



강남구 수서역 근처의 탄천변에는 쉬나무가 가로수처럼 심어져 있습니다. 기름보다 꿀을 얻기 위해 심었던 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쉬나무는 꿀이 많아 벌이 잘 날아들기에 bee tree라고 하며 밀원식물로 많이 심습니다. 아무리 벌이 윙윙거려도 대부분 꿀벌이기에 조심만 하면 쏘일 리 없습니다. 말벌은 말을 걸지 않으면 되고요.

그런데 접근이 쉽지 않은 경사면인 데다 쑥밭이 큰 키로 우거져 있어서 팔로 헤치며 가던 중이었습니다. 오른팔이 따끔! "앗, 따거!" 왼팔이 또 따끔! "앗, 따거!" 순간, 괴성을 지르며 잽싸게 도망쳤습니다.

안전지대다 싶은 곳에서 팔 토시를 걷어보니 양쪽 팔에 벌 쏘인 자국이 빨갛게 점 찍혀 있었습니다. 꿀벌이나 말벌은 아니고 뱀허물쌍살벌 같은 것의 소행으로 보였습니다. 벌 알레르기가 있는 몸이라 금세 의지가 꺾여 병원 또는 집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죽지는 않을 것 같으니 눈에 보이는 데까지만 기록해 보자, 하고 땡볕 속을 돌아다니며 쉬지 않고 기록한 쉬나무가 130그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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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고 8일 후에 다시 방문했을 때는 벌 대신 폭우가 고생을 시켰습니다. 조사를 끝마치고 나니 방수 신발이 다 젖어버렸습니다.

3차로 방문한 8월 9일에는 다시 또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땀범벅이 되어 좀 더 면밀하게 조사한 결과 총 135그루 중 66%인 89그루가 수꽃과 암꽃이 교대로 피는 암수한그루였고, 나머지 34%인 46그루가 수꽃만 피는 수그루였습니다.

기름을 얻기 위해서였다면 열매가 달리는 나무를 선별해 심었겠지만 탄천변의 것은 꿀을 얻기 위해서였으므로 성별 구분 없이 무작위로 심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암수한그루와 수그루의 비율이 2 : 1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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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의 탄천



2006년 논문에 따르면 수꽃만 피는 수그루에서 하나의 암꽃이 핀 적도 있더라고 합니다. 그런 걸 보면 쉬나무의 성 체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딱딱 나뉘어 구분되는 건 아닌 모양입니다. 어쩌면 다른 식물의 성 체계도 그런지 모르겠고요.

이밖에도 2006년 논문에서는 쉬나무의 사례와 몇몇 조사 결과를 토대로 꽃의 성 체계의 진화에 대해 재미있는 가설을 내놓았습니다. 저만 재미있지 않기를 바라며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동혁 풀꽃나무칼럼니스트(freebowl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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