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7 (월)

[허연의 책과 지성] 순암 안정복 (1712~1791)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순암 안정복은 실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보수'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인물이다. 그는 개혁군주 정조의 스승이었으며 조선 실학의 발원지인 성호 이익의 직계 제자였다. 하지만 개혁파이면서도 성리학적 명분론을 중시했다. 그는 실학자 중 가장 앞장서서 서학(천주교)을 배격했다. 안정복이 내세운 천주교 반대 논리는 박해의 이론적 근거가 됐다. 그는 동문 수학한 벗 정약종과 사위 권일신, 사돈 권철신 등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걸 보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군자를 섬기는 것이 이치인데 괴신(怪神)을 섬기는 것은 도리가 아니며 음양의 조화에 의해 만물이 생겨나고 유지되는 것인데 세상을 누군가가 창조했다고 보는 것은 이단이라는 주장은 철저히 이기론(理氣論)에 기반한 것이었다.

가톨릭 신자들 입장에서 보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이름일지 모르지만 그의 행적을 들여다보면 존경스러운 부분도 많이 발견된다.

성리학을 추종했다고 해서 안정복이 수구세력에 날을 세우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매우 늦은 나이인 예순다섯 살에 목천현감을 지낸다. 그때 남긴 '상헌수필'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풍속은 퇴폐하고 아전들이 교활하다. 이를 개혁하여 백성들을 소생시키는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녹봉이 비록 박하기는 하나 끼니 걱정이 없는데 뭘 못하겠는가."

안정복의 원칙과 기개는 단단했다. 대표 저술인 역사서 '동사강목'은 그 고집의 산물이었다. '동사강목' 서문을 보자.

"역사가의 큰 원칙은 역사의 계통을 밝히는 것, 찬역(簒逆·임금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반역함)을 엄정히 구분하는 것, 시비를 바르게 하는 것, 충절을 기리는 것, 옛 기록을 상고하는 것이다."

매일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원칙 아래 저술한 '동사강목'은 우리 사학계가 독자적 역사관을 갖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동사강목'은 단군의 정통성이 기자에서 마한 통일신라 고려로 이어진다고 봤다. 또 한족이 침입해서 세운 위만조선이나 한사군을 정통성에서 제외시켰다. 을지문덕이나 강감찬처럼 대륙세력 침략을 격퇴한 명장들의 업적을 찬양한 것도 '동사강목'의 특징이다.

안정복에게는 성리학을 신봉했으면서도 사대주의로 흐르지 않는 균형감각이 있었다. 그는 올바른 역사 서술을 위해 조선의 기록뿐아니라 중국과 일본 기록까지 교차 연구했다.

안정복의 행적을 보면 완고했지만 도덕적이면서 책임감 있었던 보수의 참다운 면모가 엿보인다.

사실 안정복은 따뜻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또 다른 일면이 드러난 글이 후세에 전한다. 그가 부인을 추모하면서 쓴 사부인곡(思夫人曲)을 보자.

"당신이 죽은 지 석 달이 지났구려. 석 달이나 지났지만 당신이 죽었는지 아닌지 여전히 모르겠소. 밖에서 돌아오면 당신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고, 배가 고프면 밥 달라 말하고 싶구려. 집안일을 헤아릴 때면 당신과 상의하고 싶은 마음이 문득 일어났다가 곧 정신을 차리곤 하오. 47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흡사 금슬을 타는 듯하였는데 이제 끝났구려."

안정복은 조강지처 창녕성씨가 사망하자 석 달 동안 비통함에 젖어 있다가 겨우 아내의 영전에 제문을 올리고 통곡한다. 애처로움이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든다.

안정복은 존경받을 만한 보수였다. 그는 "만물이 하늘의 뜻을 따르는데 사람만이 사욕으로 날뛴다"며 "자기반성을 하는 자만이 세상의 이치를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명분과 도덕성, 책임감과 인간미를 고루 갖춘 보수였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