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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화)

[매경이 만난 사람] 포용국가론 설계 성경륭 경제 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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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성경륭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이 서울 서초구 외교센터빌딩 내 경사연이 운영하는 스마트워크센터 사무실에서 매일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충우 기자]


싱가포르는 2004년부터 총리 직속으로 미래전략 전담 부서인 'RAHS(Risk Assessment&Horizon Scanning·위험도 및 미래이슈 분석)'를 운영하고 있다. 이름 그대로 미래에 불어닥칠 상황을 예측하고 국가 차원에서 보다 전략적인 대응을 하기 위해 조직된 부서다. RAHS는 광범위한 연구·조사를 통해 미래 위험 요소와 이슈를 조기 발견해 해당 요소들이 싱가포르 사회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는 시스템을 마련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한국판 RAHS 설립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을 비롯한 26개 국책연구기관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경제·인문사회연구회(경사연)의 성경륭 이사장(65)이 대표적이다. 경사연은 소관 연구기관과 함께 지난 4월 6대 위원회와 5대 공동연구단을 출범시켰다. 급변하는 미래 환경 변화에 대비할 수 있는 국가 리더십을 길러내자는 취지다. 성 이사장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정부·기업·학교 등 모든 사회 주체 내부에 미래 예측 시스템을 구축하고, 국가 차원에서 이를 조직·체계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근 일본 무역제재가 야기한 사회·정치·경제적 혼란 역시 이 같은 예측 시스템이 제때 작동됐더라면 미연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는 게 성 이사장 주장이다. 매일경제는 최근 성 이사장과 만나 각종 현안에 대한 그의 생각과 대책을 들어봤다. 2시간에 걸친 그와의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미·중 무역전쟁, 일본 무역제재 등 지정학적 혼란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현재 동북아 정세를 어떻게 인식하나.

▷지금 나타나고 있는 여러 현상에는 나름 규칙이 있다. 세계적인 패권국가와 이를 추격하는 신흥 강대국 간 필연적 갈등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헤게모니를 장악한 미국은 신흥국이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절반 수준을 넘으면 상대국을 잠재적 위협이라고 간주해 경제·군사·외교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억제해왔다. 로널드 레이건 정부 시절 소련이 첫 타깃, 그다음이 일본이었고 현재는 중국이다.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의 무역제재는 어떻게 설명 가능한가.

▷미국이 세계 패권국가라면 각 지역에도 패권국가가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침공한 것은 일종의 지역 패권국가로서의 행동이다. 일본은 지금이 한반도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맥락에서 우리나라에 대한 무역제재를 가하고 있다고 본다.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정부의 외교 실패라는 지적이 있다.

▷정부는 무한 책임을 져야 하니 그런 지적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전후좌우 관계를 놓고 보면 너무 과하게 정부를 몰아붙이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다. 국제 정세가 악화 일로로 치닫는 상황에서 국내에 끼칠 수 있는 어려움을 예상하고 준비해나가야 한다.

―구체적인 방법은.

▷군대 조직에서 운영하는 '레드팀'을 국가 차원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레드팀이란 전례 없는 위기가 닥쳤을 때 기존 지식·이론·상식 등을 뛰어넘는 사고와 판단을 통해 해법을 찾는 역할을 하는 팀이다. 전례 없는 위기가 닥치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예상하지 못한 문제까지도 예측해야 하고, 이를 위해 미약하게나마 나타나는 위기 신호를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외교적으로 보면 지금은 우호적이지만 특정 조건하에서는 대단히 적대적인 관계가 될 수 있는 상황에 주목하는 게 이 팀의 임무가 될 수 있다.

―기존에 존재했던 기구 중 무엇에 비유할 수 있겠는가.

▷조선시대에 사간원(司諫院)이라는 조직이 있었다. 이들의 임무는 항상 그날그날 진행되는 일을 보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직언을 하는 것이었다. 현대 국가 운영에서는 당시보다 훨씬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단순히 정부 차원의 하나의 레드팀이 아니라 각 부처와 기업 등에서 레드팀을 조직화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패권국가만이 존재해 세계질서가 안정돼 있을 시에는 대개 예측이 가능하나, 현재와 같이 모든 것이 가변적인 상황에서는 더더욱 필요한 개념이다. 정부가 있으면 그 뒤에서 모든 분야를 챙기고 전체를 총괄하는 일종의 그림자 정부랄까. 한국에 위기를 가져올 수 있는 요소, 지금은 우호적이지만 언제든지 적대적 관계가 될 수 있는 상황 등을 낱낱이 조사해 예측하고, 대비 계획을 세우는 조직적인 활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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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팀의 조건은 무엇인가.

▷그 누구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서는 안 되고, 그 누구의 간섭도 받으면 안 된다. 매우 냉정하고 뛰어난 안목을 지닌 그룹이어야 한다. 그 누구의 지시 또는 통제를 받는 구조 속에 두면 안 된다. 레드팀에 상응하는 '블루팀'도 있어야 한다. 블루팀에는 우리 국민과 한국 사회가 가진 잠재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이 부여된다. 과당 규제, 대·중소기업 간 협력 문제, 낡은 제도 등 우리 사회의 잠재력을 갉아먹고 있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고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임무다. 여기에 글로벌 기업이나 글로벌 자금, 또는 글로벌 재능을 결합하면 어떤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는지를 연구하는 팀이 블루팀이다. 중앙정부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기업 등 모든 주체가 이 두 가지 개념을 갖고 움직여야 한다.

―반일 정서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소신을 가진 사람도 '친일 프레임'에 묶여 침묵하게 되는 사회적 분위기도 감지된다.

▷감정이 섞인 근거 없는 비난은 옳지 않다고 본다.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을 분리해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불매운동으로 인해 방일 관광객이 줄어들어 일본 지자체장들이 국내 항공사들을 찾아 항공편을 되살려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일본에는 선의를 가진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사회적 약자도 있을 수 있다. 관광업으로 먹고사는 일본 사람들로서는 한국인 관광객이 생명줄일 수 있다. 일본의 무역제재를 막기 위한 노력은 계속돼야 하나 선의를 가진 일본 국민, 지역경제 악화로 신음하는 지역이나 중소기업에 대한 포용적 자세도 동시에 가져야 한다.

―정부와 여권이 반일 정서를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정부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민간 정서에 편승하지 않는 게 정부가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다. 민간 역시 불매운동만 할 게 아니고, 이럴 때일수록 서로의 관계를 다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간 민간에서 양국 관계가 얼마나 끈끈하게 맺어져왔나. 어느 나라든 정부는 바뀔 수 있지만, 민간은 그렇지 않다. 결국 포용을 추구하는 자가 싸움에서 이긴다고 생각한다. 이런 정신이 곳곳에서 표현되고 일본에 전달된다면 일본에서도 긍정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본다.

―문재인 대통령이 극일(克日) 방안으로 '평화경제론'을 제시한 데 대해 의문을 표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발언 자체만 보면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북핵 문제가 좀처럼 진전되지 않고 일본과의 관계도 악화 일로를 걷는 현 상황에서 나는 문 대통령이 탁월한 언급을 했다고 본다. 평화경제론은 북한에 행동에 나서라고 하는 일종의 촉구 메시지라고 해석한다. 현재 북핵 문제 키를 쥐고 있는 주체는 미국이다. 북·미 관계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선이 갈수록 불투명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 정권이 바뀐다면 지금까지 좋게 이어져온 관계도 사라질 수 있다. 북한으로서는 협상을 진전시킬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문 대통령이 평화경제론을 언급한 것은 북한에 미사일 발사 같은 도발적 행동을 자제하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 다음 단계로 진전시키자고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계속 도발하면 미국 내 여론이 한반도 평화에 대해 부정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도 해석된다.

―미국과 일본에 주는 메시지는.

▷미국이 한미동맹과 동북아시아 평화·안보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한일 관계를 푸는 데 중재자로 나서주고, 역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북핵 문제를 진전시켜보자는 뜻으로 풀이된다. 일본에 대해서는 그들이 대북정책 최우선 순위에 놓고 있는 납치자 문제를 해결하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동참해달라는 권유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저출산시대, 교육개혁 통해 국민 개개인 역량 극대화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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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륭 이사장은 문재인정부 핵심 정책 기조이기도 한 사회안전망 강화와 부의 분배에 무게를 둔 '포용국가론'을 설계한 인물이다. 현재 경사연을 맡고 있으면서도 26개 산하 싱크탱크와 함께 '혁신적 포용국가' 비전에 대한 주요 경제·사회정책 설계 연구에 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성 이사장은 남은 임기 동안 집중하고 싶은 분야로 포용보다는 개혁을 꼽았다. 그는 특히 "교육개혁을 통해 국민 개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취임 후 임기(3년)의 반환점을 돌고 있다. 남은 1년 반 동안 무엇을 하고 싶나.

▷포용도 중요하고 혁신도 중요하지만 포용과 혁신을 통합적으로 볼 때 그 접점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국민 역량이다. 모든 국민 역량을 키워야 한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해 인구가 줄어 소위 말하는 위축 사회가 오면 특히 국민 개개인의 역량이 중요해진다. 지금 한 국민이 100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면 앞으로는 이를 200, 300으로 키우는, 즉 일당백이 되도록 역량을 극대화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지적으로 충실하고, 총명하고, 창의력이 풍부한 개개인의 집합체가 돼야 한다. 혼자 달달 외워서 시험을 치르고 경쟁하는 사회가 아닌, 개개인의 재능과 지적 역량이 발전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개인들이 서로 협력하는 시회적인 관계, 즉 팀이 형성돼야 한다. 이런 팀 안에서 개인이 창의력을 발휘하고 협력도 할 수 있는 국민 역량을 키우는 게 핵심이다. 이러한 시스템이 곧 혁신 동력이 되고 동시에 포용적 기반이 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개혁, 특히 교육을 개혁해야 한다. 우리나라 대학과 기업, 공공기관 등 모든 사회기관이 모두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교육개혁이 필요하다. 학교 교육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가정교육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고, 직장·기관 내에서도 수준 높은 교육개혁이 필요하다.

▶▶ 성경륭 이사장은…

△1954년 경남 진주 출생 △서울대 사회복지학 학사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스탠퍼드대 사회학 박사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2007년 9월~2008년 2월) △한국미래발전연구원장 △한림대 사회과학대학장 △더불어민주당 포용국가위원회 위원장 △제7대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

[연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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