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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기자가만난세상] 살구향과 함께 찾아온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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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에 초파리가 정말 많이 꼬인다는 사실을 안 건 단독주택으로 이사한 뒤 봄이 찾아왔을 때였다. 마당의 살구나무에 봄마다 수많은 살구가 매달렸다. 나는 베란다에 떨어지는 살구들을 방치했다. 작년과 재작년, 베란다에는 살구의 향기에 끌린 수많은 초파리가 날아들었고, 파리를 잡아먹기 위해 아침마다 새들이 찾아와 짹짹거렸으며, 생쥐들과 도둑고양이들이 드나들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2년 동안 자연 생태계 현장을 목격했다.

방치한 이유가 따로 있지는 않았다. 살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무엇보다 귀찮았다. 그때 나는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매일 불면의 밤을 보냈다. 술에 의지하는 날이 많았다. 기사가 잘 써지지 않아 나 자신을 책망했다. 다른 사람에 비해 참으로 못났다고 생각했다. 매일매일 다른 이들과 비교하며 나를 탓했다. 자책의 반작용으로 항상 나 자신을 완벽하게 무장해야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조금의 농담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마음에는 여유가 없었고, 시야는 좁을 뿐이었다. 살구는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일보

이도형 산업부 기자


올해 4월, 다시 드리우는 살구꽃을 보면서 마음의 변화를 생각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어쩌면 마음이 마지막으로 준 기회였을지도 모르겠다. 살구를 한두 개씩 바구니에 담았다. 인터넷을 뒤져 서투르게 살구 잼을 만들었다. 솔직히 썩 맛있지는 않았다.

그때 서투름으로도 마음에 기쁨이 피어오를 수 있다는 생소한 감정을 알았다. 무엇인가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 뿌듯함을 느끼면서다. 수확으로 감정은 충만해지고 마음이 따듯해짐을 알았다. 두 번째 생소한 감정은 살구 잼을 나눠주면서 알았다. 작년부터 탄수화물을 줄이기로 결심하면서 정작 잼을 만들었지만 먹을 일이 없어졌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줬다. 같이 사는 세입자에게 줬고, 친하게 지내는 선·후배에게 나눠줬다. 칭찬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한 일이었다.

특별한 의도 없이 한 일에 기쁨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사람들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고맙다는 말을 해줬고 감사했다. 그 표정을 보았을 때 문득 마음이 열렸다. 내가 뭔가를 주고도 남보다 기쁜 감정을 느낀 게 처음이었다. 선물을 주거나, 받은 적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항상 계산을 했다. 나한테 돌아올 감사의 총량을 계산해 선물을 줬고, 받을 때도 꼭 그만큼 감사했다.

이제야 나의 행동이 보잘것없어도 내 마음을 얼마든지 채울 수 있고, 그때 찾아오는 행복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았다. 그 전까지는 나 자신이 대단하고 그렇게 될 것임을 확신하려 했다. 하지만 그건 나 스스로가 ‘마음의 빈곤’을 감춘 채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발버둥 쳤을 뿐이었다. 비로소 내가 그동안 얼마나 비루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았다. 이제는 안다. 나는 대단하지 않으며 그저 보통의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은 대단하다. 평범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드디어 기뻐졌다.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도 그렇게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살구가 나에게 준 선물이다.

이도형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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