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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4 (화)

[일사일언] 홍콩 할매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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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도시괴담 수집이 취미다. 무서운 걸 좋아한다기보다 당대 사회상과 환경 변화에 대한 불안이 고스란히 담겨 흥미롭다. 아파트 거주가 보편화되자 엘리베이터를 둘러싼 괴담이 늘어났다. 수험 열풍이 일자 밤늦게 귀가하는 학생들 납치 괴담이 늘었다. 그럼 역대 가장 유명했던 '홍콩 할매귀신' 괴담은?

'홍콩 할매귀신'은 1989년 서울 초등학생들 사이 퍼져나간 괴담이다. 대한항공 여객기로 홍콩에 가던 할머니가 추락 사고를 당하고 고양이와 합체한 귀신이 돼 하굣길 초등학생들을 덮친다는 내용이다. 화를 면하려면 엄지손가락을 쥐고 숨겨야 한다는 주문도 추가됐다. 사실상 만화보다 못한 얘기인데, 당시엔 등교 거부 사태까지 벌어지는 사회문제가 됐다.

이 괴담은 어떤 식으로 생성된 걸까. 먼저 대한항공 여객기 추락.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테러와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맞물려 떠오른 발상일 수 있다. 비행기라는 새 이동 수단에 대한 불안이 담겼다. 고양이와 할머니가 합체된 귀신은, 1988년 비디오로 출시된 홍콩 영화 '흉묘' 모티브가 아닐까 싶다. 고양이와 인간이 합체된 요괴가 등장한다. 엄지손가락을 숨기란 주문은 일본의 전래 미신이다. '원혼은 엄지손가락을 통해 들어온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영구차 등을 보면 엄지손가락을 숨기라는 주문이 존재한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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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홍콩 할매귀신'에도 당대 면면들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셈이다. 연달아 일어난 대한항공 폭파 테러와 해외여행 자유화, 1980년대 홍콩 영화 열풍. 그리고 일제시대 들어왔을 법한 일본 미신이 아직 남아 있던 시대. 거기다 애초 저 괴담이 퍼지게 된 것도 자녀 귀가를 통제하려던 부모들 꼼수였으리란 설이 지배적이다. 자녀 과보호 시작점이란 점에서 한 시대를 드러내 준다.

요즘도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신종 괴담들을 수집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비슷한 괴담들이 많아지는 분위기다. 백수 청년이 집에서 정체불명 택배를 받는 설정들. 무엇을 드러내는지는 참 명확하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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