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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먹거리 공화국]우리농촌살리기운동 25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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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농촌에 가면 ‘카농’이란 말을 종종 듣는다. ‘가톨릭농민회’의 줄임말이 ‘가농’이고, 1970~1980년대 지역에서 ‘카도릭농민회’라고 발음을 하곤 했기 때문에 아직도 ‘카농’이 입말에 붙어서다.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농민운동 조직은 ‘가톨릭농민회’였고, 굵직한 농민운동가 상당수가 ‘카농’ 출신이다. 고(故) 백남기 농민도 가톨릭농민회 전국 부회장까지 지낸 가톨릭농민회의 대표적인 운동가였다. 당시 박정희와 전두환이라는 희대의 폭력 앞에서 가톨릭교회의 보호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든 아니든 ‘가톨릭농민회’ 회원으로 가입해 농민운동을 펼쳤다. 1985년 소를 끌고 나와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소 값 피해보상투쟁’이나 수세폐지 운동, 의료보험 통합제 투쟁, 수입개방 저지 등 한국 농민운동사의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그러다 더 이상 종교의 보호를 청하지 않아도 될 만큼 농민운동의 힘이 축적되고 1990년 전국적인 농민운동조직인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이 창립되면서 가톨릭농민회는 본연의 일로 돌아왔다. 대표적인 운동이 ‘우리밀살리기운동’이었다. 여전히 농민운동가들 중에서는 가농과 전농의 멤버십이 겹치곤 한다. 뿌리가 같아서 그렇다.

단일조직의 농민회가 만들어졌지만 농촌의 삶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자유무역의 기조에 따라 농산물 개방의 십자포화를 당하던 차에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UR) 타결에서는 쌀 개방까지 예고했다. 모든 것이 다 열린다는 뜻이고 농민들의 분노와 두려움은 상상을 넘어섰다. 지금과는 달리 농촌에 뿌리를 두는 도시민이 많았던 때여서 농촌의 처지에 함께 아파했다. ‘우골탑’을 쌓아 서울로 도시로 온 대학생들이 농촌에 가서 농활을 하고, 다시 자기 고향에 내려가 부모의 농사를 돕던 시절이었으니 도시민들도 쌀 시장 개방만은 반대했다.

이에 가톨릭농민회는 농촌현실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연대를 촉구했다. 그리고 1994년 김수환 추기경이 농업문제해결을 촉구하는 담화문을 통해 “오늘날 농업, 농민이 처한 어려움은 비단 농민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 문제이며, 모든 국민이 자기 문제로 인식하고 이를 위한 책임 있는 행동이 없는 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찾아질 수 없다는 것”을 명동성당에서 천명한다. 그렇게 1994년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우리농)’가 만들어졌다. 가톨릭농민회가 생태적으로 농산물을 생산하면 우리농 소비자들은 의식적으로 소비하여 도농공생을 꿈꿔왔다. 우리농운동은 국산 농산물 소비운동을 넘어서 생태지향성이 강해 유기농 및 친환경 농산물과 생활재 소비를 독려하고, 도농 공생과 생태적 삶에 대한 고민을 하자는 목표를 설정했다. 하지만 초창기에 농민들도 농약 없이 짓는 농사에 대한 기억을 잃은 상태였고, 소비자들은 예쁘장한 농산물에 익숙해져 있어 운동의 속도는 더뎠다. 게다가 한국의 농업·농촌은 격변했다. ‘수입농산물’이라고 지칭하기도 힘들 정도로 글로벌 차원에서 먹거리는 생산되고 소비된다. 라면 한 봉지에 관여하는 국가만 해도 여럿이다.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가 창립 25주년을 맞이했다. 이 운동을 제안했던 이들도 이제 늙어 고된 유기농 농사에 힘이 부친다. 세상은 농촌을 죽여왔지만 이들은 살리는 길을 느리게 걸어왔다. 근래 서울 송파구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안동 우리농의 친환경 농산물을 공급받기로 했다고 한다. 속도보다 방향을 택한 우공이산의 행보에 응원을 보낸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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