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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황정미칼럼] 21세기 멜로스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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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국제정치 현장의 불편한 진실 / 반일 코드로 뭉쳐선 美·日 못 움직여

“여러분도 알다시피 정의는 오직 동등한 힘을 가진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강자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고, 약자는 받아야 할 것을 받는 것이다.”

“정의는 도외시하고 득실에 관해서만 논의하자는 말인데 보편적 선(善)을 지키는 것이 당신들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귀국이 무너질 때 처절한 보복을 받는 본보기가 될 것이다.”

세계일보

황정미 편집인


“여러분은 대등한 상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느냐의 문제다.”

“우리는 불의에 대항해 싸우는 편에 있으므로 신이 우리에게 행운을 베풀 것이다. 우리의 미약한 힘은 동맹국가가 채워줄 것이다.”

“여러분의 주된 논거는 미래의 희망과 관계에 있는 데 반해 현재 실력은 지금 당신들이 대치할 세력에 맞서기에는 너무 미약하다.”

기원전 416년 에게해의 작은 섬나라에서 벌어진 아테네 제국 사절단과 멜로스섬 대표들 간의 대화다. 아테네의 역사학자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담겼다.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주의를 보여주는 일화로 종종 인용된다. ‘약자’답게 속국이 되라는 아테네 요구에 정의와 신의 호의, 동맹국 스파르타를 앞세워 항전한 멜로스는 참패했다. ‘총·균·쇠’의 저자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최신작 ‘대변동’에서 ‘멜로스의 대화’를 소개하면서 “이웃한 대국의 위협을 받는 국가는 다양한 선택안을 고려하며 냉철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교훈”이라고 적었다. 그는 러시아와 핀란드 관계를 예로 들었는데,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 떠오른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아베 신조 일본 정부와 명분과 원칙론으로 맞서는 문재인정부의 대충돌 말이다.

진짜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 불편한 진실이 하나둘 드러나고 있다. 첫째, 실력차다. 일본이 발표한 수출 규제 품목은 우리 기업이 90%가량 의존하는 소재들이다. 역대 정부 때부터 소재부품 산업 육성, 수입선 다변화를 추진해왔지만 첨단 소재부품 대일 의존도는 40∼50%에 달한다. 아베 정부가 공언한 대로 안보상 우호국 리스트에서 한국을 뺀다면 파장은 간단치 않다. 그제 문 대통령이 청와대 회의에서 “우리 경제 성장을 가로막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한 배경이다. 둘째, 단기간에 끝날 판이 아니다. 그간 양국의 과거사 갈등으로 쌓인 불신을 연료 삼아 아베는 한국을 안보 협력 후순위로 미루며 관계를 조정했다. 경제, 외교적으로 위상이 오른 한국을 견제하려는 ‘때리기 전략’이란 시각도 있지만 중국 부상으로 인한 미·중 패권 경쟁과 아베의 ‘군사대국화’ 야욕을 감안하면 한·일 관계 패러다임 변화는 더 넓고, 길게 봐야 할 것이다.

셋째는 미국 입장이다. 정부의 SOS에도 동맹국인 미 정부는 “어느 쪽도 편들기 어렵다”고 했다. 지난 5월 본지가 자매지 워싱턴타임스, 세카이닛포와 공동 주관한 국제지도자콘퍼런스(ILC)에서 미측 전문가들은 한·일관계가 동북아 안보협력틀의 ‘구멍’이 되고 있다며 한국 측에 과거사 극복을 주문했다. 피해국 입장에선 가해국에 따져야 할 문제라고 정색할 일이지만 5년 정권마다 되풀이되는 과거사 갈등에 미 조야의 냉담함이 느껴진다. 더욱이 동맹을 가치가 아니라 실익으로 따지는 트럼프 정부가 한국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길 기대하긴 어렵다. 아베가 트럼프 정부의 암묵적 승인하에 저렇게 나오는 거 아니냐는 의혹이 힘을 얻는 실정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약육강식의 국제정치 질서를 무시할 수는 없다. 물론 한국이 100년 전의 약소국은 아니다. 그렇다고 반일 코드에 기대어 싸움판을 키울 수도 없다. 우리 기업, 국민에 미치는 손실이 큰 탓도 있지만 국가 간 신뢰가 깨지면 이를 원상 복구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권력 핵심부에서 나오는 ‘이순신 장군의 12척’ ‘죽창가’ ‘국채보상운동’ 운운에 고개를 돌리게 되는 이유다. 선린우호국 없이 생존이 어려운 21세기에 19세기적 발상이 놀랍다. 국민들 사이에 반일 감정이 번지더라도 “정부를 믿고 자제해달라”고 호소하는 게 집권 세력의 책무 아닌가. 양국 국민들 간 우의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냉철한 판단속에 최대한의 외교적 노력을 쏟는 게 우선이다. 그다음 할 일은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실력을 쌓는 일이다.

황정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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