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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공감]달려라,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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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해버렸다. 200m와 400m, 1600m 계주까지 열다섯 살 양예빈 선수가 달리는 모습을 편집한 4분27초 분량의 유튜브 동영상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았는지 모른다. 머리카락을 야무지게 땋아 묶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내달리는 모습을 보면 내가 바람을 가르는 것 같다. 그러나 정작 내 인생에 그런 달리기의 기억은 없다. 양 선수가 지난 5월 열린 전국소년체전에서 200m 1위를 차지하며 세운 기록은 25초20. 내 생애 최고기록은 30여년 전 대학입학을 위해 치른 체력장에서 100m를 20초에 달린 것이다. 나는 체육시간이면 주눅 드는 아이였고, 피구든 발야구든 팀을 갈라 게임이라도 할 때면 속한 팀에 민폐가 되는 존재였다. 흔한 ‘운동 못하는 여자’였고 지금도 그렇다.

경향신문

그런 내가 달리기하는 여자, 축구하는 여자 때문에 설렌다. 지난 7일 끝난 2019년 여자 월드컵에서 우승한 미국 여자 축구팀의 미드필더이자 공격수 메간 라피노. 월드컵 출전만 세 번째인 서른 네 살의 그는 이번 대회에서 여섯 골을 넣어 득점왕이 됐다. 프랑스와 8강전을 치르며 골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빠르고 낮게 차 프랑스팀 수비수들과 골키퍼의 다리 사이를 관통하고 골망을 흔든 프리킥은 영리하고 날카로웠다.

양예빈과 라피노를 보던 즈음, 나는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베트남 출신 아내의 동영상도 보았다. 양예빈, 라피노와 함께 달리며 숨차던 내 몸은, 베트남 아내가 주먹질과 발길질을 당할 때도 똑같이 떨리고, 숨막히고, 몸서리쳤다. 소리 질러요, 누가 좀 와 줘요,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아우성들이 내 안에서 들끓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치가 떨렸다. 그 분노 때문에 거칠 것 없이 내닫던 두 여자들의 모습을 보고 또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현대미술가 바바라 크루거의 전시회에 가면 절반은 양화, 절반은 음화로 표현된 여성의 얼굴 위에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Your body is a battleground)라는 말이 오려 붙여진 그의 기념비적인 포스터와 맞닥뜨릴 수 있다. 1989년 미국 워싱턴에서 있었던 여성의 낙태권리 회복 시위를 지지하기 위해 크루거가 만든 이 포스터의 명제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땅에서 다채롭게 변주된다.

혼자 사는 여성들은 자신의 거처를 들고나는 일조차 두렵다. 언제 누가 내 집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엿볼지, 내 뒤를 따라 들어와 덮칠지 불안하게 주위를 살펴야 한다. 대중 앞에 얼굴을 내놓고 사는 지상파 방송의 남성 앵커도 지하철역에서 여성의 몸을 불법촬영하는 나라에서는 관음증으로부터의 안전지대가 없다. 여성용 공공화장실 문에 달린 옷걸이의 작은 구멍마다 휴지가 꼭꼭 메워진 풍경은 이 관음증에 여성들이 느끼는 공포의 수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국여성의전화가 2017년 한 해 동안 언론에 보도된 살인사건 243건을 분석한 결과,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에 의해 살해된 여성이 85명이었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가정폭력은 여전히 피해자가 원치 않을 경우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의 영역에 있다.

여성이 몸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위험과 폭력 앞에 노출되는 이유가 되는 세상에 살다보면 여성은 그것이 마치 본성인 양 자신의 몸과 관련된 일들에 움츠러들게 된다. 맞받아쳐야 하는 순간에 얼어붙는다. 그러지 않아도 한국의 여자아이들은 자신의 몸을 던져가며 놀고 즐기는 능력이 ‘사내다움’으로 칭찬받고 장려되는 남자아이들과는 달리 운동을 못해도, 자신을 방어하는 힘을 기르지 않아도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는 환경에서 자란다.

여성에 폭력적인 사회구조와 법, 제도를 바꾸는 것은 더 말할 필요 없이 지속해야 할 일이다. 개인이 신체적으로 약하든 강하든 폭력으로부터 보호되지 못하는 사회는 야만의 정글일 뿐이지 않은가. 그와 더불어 여성의 몸에 대한 서사도 다르게 쓰여야 한다. 어린이집부터 할머니가 될 때까지 튼튼한 몸, 역동하는 몸이 아름다운 여성의 몸으로 교육되고 격려되어야 한다. 달리는 양예빈과 라피노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정은령 |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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