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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김기천 칼럼] '안 봐도 비디오', 왜 자꾸 만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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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요즘 교통 분야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개념이 마스(MaaS·Mobility as a Service)다. ‘서비스로서의 이동성 또는 교통’이라는 의미다. 모든 교통수단을 편리하게 연계해 최적의 이동방법을 서비스하는 게 핵심이다. 국내에서 큰 논란을 빚고 있는 차량공유 서비스보다 한층 진전된 개념이다.

마스의 선두주자는 핀란드다. 스타트업인 ‘마스 글로벌’이 개발한 모바일 앱 ‘휨(Whim)’이 그 주역이다. 고객이 휨에 접속해 출발지와 목적지를 입력하면 최단·최적 경로의 이동 방법을 제공받을 수 있다. 택시, 버스, 트램, 전철, 페리, 렌터카, 공유 자전거, 스쿠터 등 가장 적합한 교통수단의 이용권과 함께 예약 서비스도 제공된다.

요금은 그때그때 결제할 수도 있고, 한달 이용료를 내고 아무 때나 이용할 수도 있다. 가장 비싼 무제한 이용금액은 월 499유로(약 66만원)다.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의 자가용 소유자들이 지출하는 월 평균 자동차 유지비용과 비슷한 수준이다. 자가용을 대체하고, ‘소유’에서 ‘이동’으로 교통의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마스의 목표와 어울리는 요금이다.

휨을 이용한 모빌리티 서비스는 2016년 10월 헬싱키에서 처음 시행됐다. 6개월만에 4만5000명의 고객을 확보하며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에 힘입어 마스 글로벌은 영국 버밍엄, 벨기에 안트베르펜, 싱가포르에도 진출했다.

경쟁업체들도 속속 등장해 마스 시장이 급성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2030년까지 세계 마스 시장이 1조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100년전 포드 자동차가 자가용 시대를 연 이후 가장 큰 혁명"이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민간 기업이 국가적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원래는 정부가 직접 시행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다양한 교통수단에서 공영 대중교통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민간기업이 아무리 좋은 앱을 만들어도 대중교통 시스템과 연결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마스는 정부가 주도하거나 적극 지원해야만 가능한 사업이다.

핀란드 정부도 일찍부터 관련 사업을 추진했다. 핀란드 교통통신부는 2009년 지능형 교통전략을 발표하며 교통정책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교통통신부는 민간 전문가들의 아이디어 등을 종합해 교통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면서 마스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내기도 했다.

마스에 필요한 통합 교통정보망 등 관련 인프라도 대부분 정부가 구축했다. 스타트업인 마스 글로벌이 한 일은 그 인프라 위에서 작동하는 앱을 개발한 것이다. 물론 이 부분도 정부나 공공기관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민간 전문가들이 뛰어난 성능의 앱을 개발하자 핀란드 정부는 대중교통 사업의 문을 열어주고 마스의 사업화를 적극 지원했다.

핀란드 정부는 마스를 국가 경쟁력과 경제성장의 새 동력으로 간주하고 있다. 관건은 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이를 키워나가는 것이다. 이는 정부가 아니라 민간이 더 잘할 수 있는 일이다. 핀란드 정부가 공공앱 대신 민간앱을 받아들이고 지원한 이유다.

한국에선 흔히 정반대 현상이 벌어진다. 민간이 잘하고 있는 분야에까지 정부가 뛰어들어 시장을 혼탁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정부나 공공기관이 미래 성장 산업을 선점하고 진입장벽을 쌓아 민간 기업이 싹트고 자랄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리기도 한다.

서울시가 최근 시범운영 한달만에 중단한 택시호출앱 ‘S택시’가 하나의 사례다. 호출을 거부하는 기사에게 과태료 부과를 검토한데 대해 기사들이 반발한데다 앱의 성능이 떨어지고 서비스도 불안정했다. 서울시는 2017년에도 택시호출앱 ‘지브로’를 출시했다가 이용이 저조해 1년만에 운영을 접은 전력이 있다. 카카오 택시 등 민간 택시앱이 활성화돼 있는 시장에 뛰어들었다가 돈만 날린 것이다.

영세 자영업자들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내놓은 ‘제로페이’도 비슷하다. 공무원 동원해 가맹점 모집하고, 정부 예산으로 홍보하고, 소득공제 혜택 등 관련 법규와 제도로 지원하고, 은행을 비롯한 참여 기업들을 끌어들여 온갖 이벤트를 벌이고 있지만 실적이 지지부진하다. ‘관제 페이’로 불공정 경쟁을 하면서 온라인 간편결제 시장만 흐리고 있다.

서울시 뿐만이 아니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개발 운영하다 활용도가 저조해 사라진 공공앱이 2016년 이후에만 500개가 넘는다. 코레일 자회사가 역사내 편의점·자판기 사업을 하고 있는 등 공공기관들이 민간 영역에 무분별하게 진출해 성장과 고용을 위축시키고 있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공공과 민간의 역할 구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이다.

서울시는 몇년전 서울 브랜드를 공모하면서 ‘공무원이 만들면 안 봐도 비디오’라는 광고로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서울 브랜드, 당신 없인 망합니다!’라고도 했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호소하기 위한 셀프 디스(self dis) 광고였다. 광고 덕분에 시민 참여가 얼마나 늘었는지 모르겠지만 광고문안에 크게 공감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안 봐도 비디오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계속 실패작을 찍어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정부가 민간보다 잘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고, 실패해도 책임지는 일이 없어 부담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세금을 헛되이 낭비해도 누군가는 챙기는 게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정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분별이 절실하다.

조선비즈 논설주간(kckim@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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