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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한·일 갈등 강대강 가면 안 돼, 한국 피해가 제일 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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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공학한림원 회장단의 조언

“갈등 본질인 정치·외교로 풀어야

과거 미·일 반도체전쟁 일본 참패”

“한국경제 5년 버티기 힘든 상황

지금이 명운 가를 크리티컬 아워”

중앙일보

공학한림원 회장단이 한국경제의 현 상황을 진단했다. 그들은 ’기업인과 달리 정부가 큰 위기의식이 없다“며 ’정부 주요 인사들이 산업 현장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박동건 공학한림원 상임부회장(전 삼성디스플레이 사장), 권오경 공학한림원 회장(한양대 석학교수), 장석인 공학한림원 산업미래전략위 부위원장(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김영민 공학한림원 산업미래전략위 위원(LG경제연구원 원장). 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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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불거진 한·일 갈등이 없어도 길어야 5년밖에 버틸 수 없는 것이 한국경제의 현주소입니다.”

한국의 대표 기업인과 공학자들로 구성된 한국공학한림원 거물들의 현실진단은 엄중했다. 일본의 경제보복을 둘러싼 한·일 갈등이 강대강(强對强)으로 치닫고 있고 조만간 기업의 생산라인이 중지될 판인데,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공학한림원 지도부들은 지난 12일 중앙일보와 만나 “한국이 지금처럼 강대강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며 “정치적·외교적 역량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인 권오경(64) 한양대 석학교수와 박동건(60) 전 삼성디스플레이 사장(공학한림원 상임부회장), 장석인(61)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김영민(58) LG경제연구원장이 그들이다. 권 회장과 박 사장은 각각 학계와 재계를 대표하는 반도체 전문가, 장 연구위원과 김 원장은 경제학 박사다.

장석인 선임연구위원과 권 회장은 세계 경제분쟁의 역사 속에서 한·일 갈등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1980년대 미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진 ‘반도체 전쟁’이 거론됐다. 일본의 NEC·도시바 등에 밀려 인텔 등 미국의 반도체 회사들이 고전을 겪고 있을 때다. 지금 한·일 관계처럼 미·일간 갈등이 벌어졌다. 미국은 경제보복을 통해 일본 내 미국산 반도체 점유율을 기존 10%에서 20%로 높이고, 일본의 메모리 반도체 수출을 덤핑이라며 중단시켰다. 결론은 일본의 일방적 패배였다. 미국이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고 나서야 분쟁은 끝을 맺었다.

장 위원은 “당시 미·중 반도체 전쟁 속에 일본에서는 2년에 1개 반도체 회사가 문을 닫았다”며 “그 틈을 비집고 한국의 반도체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권 회장은 “한·일 양국 간 갈등이 계속 대립관계로 치닫다 보면 약자인 한국의 피해가 제일 클 수밖에 없다”며 “이번 분쟁의 본질이 경제가 아니라 정치·외교인 만큼 어느 때보다 정치적 외교적 역량을 보여줘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들은 한·일 갈등과 같은 경제분쟁을 막기 위해서는 기술 독립과 분업에 대한 국가적 전략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박동건 전 사장은 “당장 국산화·기술독립과 같은 얘기가 나오는데, 강대국이 아닌 우리나라가 모든 것을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도록 세계가 내버려 두지 않는다”며 “우리의 취약점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수입할 것은 하고 협력할 것은 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 회장은 “아직 따라가지 못한 소재 분야는 기술확보를 하려고 해도 앞으로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그간 전략을 세우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정권이 5년마다 바뀌다 보니 지속적인 실행력이 따라가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한국 경제는 지금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있다. 신년사에 단골로 나오는 ‘수사(修辭)적 위기’가 아니라 ‘실체적 위기’라는 얘기다. 권 회장은 현재를 ‘크리티컬 아워(Critical hour)’라고 까지 표현했다. 크리티컬 아워는 납치 혹은 실종사건에서 통계적으로 피해자를 구할 수 있는 운명의 시간을 말한다. 한림원은 현재 한국은 국가의 경제적 명운을 가를 시간을 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럼에도 한국사회는 지금 기업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권 회장은 “대표적인 사례가 주 52시간제 도입”이라며 “특히 신산업과 혁신에 가장 앞장서야 하는 벤처기업이 52시간에 묶여서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동건 전 삼성디스플레이 사장은 “미국은 일률적 근무 규정이 없고,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느슨하다”며 “단순 노동자는 52시간제로 보호하는 게 맞지만, 신기술·연구개발 분야는 일률적으로 적용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한림원 수뇌부들은 최근 이어지고 있는 자화자찬식 정부의 과학기술·경제정책 평가를 비판했다. 지난 5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과학기술·정보통신기술(ICT) 2년 성과 발표와 지난 5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과학기술정책 대토론회가 대표적 사례였다. 코엑스 토론회에서는 문미옥 과기정통부 1차관이 첫 번째 기조발표자로 나와 “현 정부 들어▶과학기술혁신체제가 복원되고▶기초연구비가 2배 증액됐으며▶혁신성장 연구개발(R&D) 플랫폼이 구축됐다”고 자평했다. 정부 R&D 예산이 올해 처음으로 20조원을 돌파한 것도 사례로 거론됐다. 정책 실패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이날 행사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와 한국과학기술한림원·과기정통부가 공동주최한 것으로 돼 있지만, 실상은 달랐다. 과기정통부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등 정부 산하기관의 팔을 비틀어 만든 행사였다.

이들은 한국의 과학기술 진단이 온통 장밋빛인 이유를 “관료가 실책과 무능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며 “정부 R&D 성공률이 100% 육박하는 현실은 말이 안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권 회장은“왜 연구현장에서 실패할 수 없는 과제를 해야만 하는지 진지하게 반성해야 한다”며 “현재와 같은 관료 시스템 아래에서는 아무리 많은 예산을 투입해도 헛일”이라고 강조했다.

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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