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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 (일)

[허연의 책과 지성] 표트르 크로폿킨 (1842~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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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아나키스트(Anarchist)'라는 단어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우선 기름기라고는 없는 격음(激音)으로 구성된 음가가 매혹적이다. 그리고 무한자유를 상징하는 듯한 낭만,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허무한 테러리스트 이미지도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사실 아나키스트를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하는 건 좀 지엽적이다.

'아나키즘' 어원인 그리스어 아나르코스(Anarchos)는 '선장이 없는 배의 선원들'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 말은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무질서'라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는 '누구든지 지도자나 선장이 될 수 있는 열려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래서 혹자는 아나키즘의 제대로 된 번역은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자유연합주의'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나키즘에 대한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책이 표트르 크로폿킨의 '상호부조론(Mutualism)'이다.

크로폿킨은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이다.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명망 있는 지리학자이자 동물학자였다. 그런데 그는 다른 학자들과는 결이 달랐다. 젊은 시절 시베리아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다양한 동물을 관찰한 그는 다윈의 적자생존론에 반기를 든다.

그가 보기에 작은 곤충에서 거대한 육식동물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서로 도우면서 상호작용을 통해 삶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경험이 훗날 '상호부조론'의 토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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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다윈 추종자들은 동물들의 세계를 서로 피에 주린 개체들이 벌이는 끝없는 투쟁으로만 여기게끔 만들었다…이들은 급기야 이익을 위한 '무자비한 투쟁'을 인간을 지배하는 생물학적 원리로까지 끌어올렸다." 크로폿킨은 '상호부조론'을 통해 생명체가 기나긴 진화 과정을 통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욕망과 투쟁이 아닌 배려와 공존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상호부조론은 근대 무렵 수많은 세계 젊은이들을 흥분시켰다. 특히 식민지 조선 청년들이 상호부조론에 많이 경도됐다. 강대국에 둘러싸여 국권을 잃어버린 조선 청년들은 '열성은 우성에 의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약육강식의 다윈주의를 인정하기 싫어했다. 그런 그들에게 상호부조론은 한줄기 빛과 같았다.

그때 크로폿킨에게 영향을 받아 아나키즘 운동에 나선 대표적인 인물이 신채호, 이회영, 백정기, 박열 같은 사람들이다.

아나키즘이 매혹적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아나키즘 자체가 실현된 적이 한 번도 없는 '꿈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위정자를 내세우는 걸 우선시하지 않다 보니 아나키즘은 조직체로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아나키스트들은 권력에 이용만 당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광복 이후 아나키스트들이 남과 북 모두에게 버려졌듯 아나키스트들은 주인공이 되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섰다. 하지만 아나키즘이 영원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아나키즘은 여전히 다른 방식으로 우리 곁에 살아 있다.

지구 생태운동이나 장애인보호정책에서부터 유엔이나 유럽연합(EU) 같은 국제기구의 이론적 기초에 이르기까지 아나키즘이 반영된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기술문명이 발전하고 세계화가 이행될수록 아나키즘은 오히려 더 많은 분야에서 향기를 풍길 것이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고 외쳤던 크로폿킨의 희망 섞인 주장이 자꾸 생각나는 요즘이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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