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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World People] 보수당 경선 탈락하고도… 영국을 매료시킨 이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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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 스튜어트 국제개발부 장관

영국 차기 총리를 선출하는 보수당 대표 경선에서 스타가 탄생했다. 결선에 올라 총리 자리를 겨루고 있는 보리스 존슨(55) 전 외무장관과 제러미 헌트(52) 현 외무장관을 말하는 게 아니다. 3차 투표서 5위로 탈락하면서도 국민적 인기를 휩쓸며 차차기 주자로 급부상한 로리 스튜어트(46) 국제개발부 장관이다.

보수·진보 언론 모두 그를 두고 "미래의 총리가 현관 앞에서 미소를 띤 채 잠시 멈춰 섰다"(인디펜던트), "여당 정치인도 브렉시트의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유산을 남긴 유일한 후보"(파이낸셜타임스)라고 추어올렸다.

스튜어트는 당초 10여 명이 경선에 출사표를 낼 때 최하위로 분류되던, 무명에 가까운 의원이었다. 그런데 잇따른 TV토론에서 이목을 끌더니 지난 18일 2차 투표에서는 4위까지 올라 "판을 뒤집는 후보가 나타났다"(CNN)고 외신들이 타전할 정도였다. 당내 지지가 워낙 취약해 결국 낙마했지만 극우 여론 눈치만 보는 후보들과 달리 "존슨이 주장하는 노딜(no-deal) 브렉시트는 완벽한 거짓말로 국가에 재앙을 가져온다"면서 브렉시트 포퓰리즘에 제동을 걸어 '용기 있다'는 찬사를 들었다.

스튜어트는 '브렉시트의 불편한 진실'을 알리는 방식에서부터 "영국의 정치 교과서를 찢었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브렉시트 합의안이 표류된 지난 몇 개월간 국민을 직접 만나 토론하는 '전국 대장정'을 해왔다. 보수당 지지가 약한 지역에서 좌파 노동당 지지자들을 집중적으로 만났고, '브렉시트당'으로 뜬 극우 정치인 나이절 패라지(55)와도 격론을 벌였다. 그 장면을 시민들이 찍어 유튜브에 올리며 "보수당엔 이런 정치인도 있다"는 입소문이 났다. 의회 민주주의 전통이 강한 영국에선 전례 없는 실험으로 받아들여졌다.

스튜어트는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나 영국 최고의 명문 사학인 이튼스쿨과 옥스퍼드대를 졸업했다. 영국 정계에선 흔한 학력이지만 스튜어트는 차원이 다르다. 텔레그래프 등에 따르면 이튼스쿨은 1992년 스튜어트 졸업 당시 유명 화가에게 의뢰해 눈빛이 형형한 18세의 스튜어트 초상화를 제작해 보관하고 있다. 이튼은 1754년부터 100여 년간 매년 뛰어난 학생 2~3명을 뽑아 초상화를 남기다가 명문가 자제들 간의 갈등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중단했는데, 140년 만에 그 전통을 부활시킬 정도로 그가 압도적으로 우수했다는 것이다.

스튜어트가 옥스퍼드대 재학 당시 윌리엄 왕세손과 해리 왕손의 과외교사로 일한 사실도 대중의 신비감을 증폭시킨다. 이튼스쿨 책임자가 찰스 왕세자(70)로부터 '왕자들이 형처럼 따를 선생을 소개해달라'는 은밀한 부탁을 받고 스튜어트를 보냈다.

스튜어트가 버킹엄궁에서 화장실을 찾다가 왕족을 위한 특수 보안 공간 '패닉룸'에 잘못 들어갔다가 "문이 안 열린다"며 난동을 부리자, 찰스가 잠옷 차림으로 뛰어나와 직원에게 강철문을 도끼로 부수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의 최대 이력은 외무부 엘리트 코스를 버리고 빈국의 황무지와 전쟁터에서 7년간 '고행'을 자처한 것이다. 27세 때인 2000년 "기득권에만 복무하기 싫다"면서 이란과 네팔·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인도까지 1만㎞를 혼자 도보로 여행했다. 무슬림의 터번 차림에 페르시아어를 구사하는 백인이 아프간 부족 간 분쟁 해결사로, 또 이란 군벌과의 대화에도 나서자 현지 영국군은 아랍의 영국 정보 장교였던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따 '벨그라비아(런던 부촌 지명)의 플로렌스'라는 별명으로 그를 불렀다.

서방 연합군의 대테러전 핵심인 아프간 전장을 철학적으로 관찰한 그의 책(The Places in Between)은 2006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다. 여행작가로 유명해지면서 하버드대에서 인권 강의를 했으며,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의 아프간 자문관도 지냈다. 그러나 당시 활동의 실체가 정보기관 MI6 부국장까지 지낸 아버지를 따라 중동 스파이 노릇을 한 것이란 의혹도 있다.

스튜어트는 20~30대 시절 파격적 행로나 현재의 '대장정' 정치는 "아버지 임지인 홍콩·말레이시아 등에서 자라면서, 열대 정글에서 대나무 뗏목을 만들어 탐험하던 하이킹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다운증후군인 여동생을 돌보는 어머니와 떨어진 채 '특권층 바깥의 삶'을 일부러 단련했다는 것이다. 2010년 정치 입문 전까지의 그의 삶은 런던에서 연극으로도 제작됐고, 할리우드 스타 브래드 피트와 올랜도 블룸이 영화화 판권을 사기도 했다.

[정시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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