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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86세 `藝妓`의 춤판, 세월의 급소를 찌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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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21일 소고춤을 추는 권명화 명인. [사진 제공 = 한국문화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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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며 배운 춤은 '배움'이 아니라 '겪음'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저들에게 춤은 추어지는 '일'이 아니라 겪어지는 '짓'이다.

눈짓으로 '쓰윽' 바라보자 이날 객석의 숨소리는 얼어붙었고, 손짓으로 '딸깍'거리자 춤이 우수수 떨어져 침묵을 채웠다. 그것은 격정이었다. 배움도 겪음도 아닌, 차라리 온몸의 흐느낌에 가까웠다.

근육이 아니라 뼈로 춰야 명무(名舞)들의 춤판일 터. 우리 시대 마지막 예기(藝妓) 권명화 명인(86)도 앙상한 가죽 하나 두르고 '두 언니'와 수양아버지를 기리고자 최근 서울 남산국악당에 섰다. 한국문화재재단 주최 공연 '몌별(袂別) 해어화(解語花)'였다. 우리 춤의 급소를 찌른 이날 공연의 안팎을 뒤따랐다.

두 예술인을 향한 '레퀴엠'과도 같은 무대를 이해하려면 시계추를 6년 전으로 고쳐 달아야 한다. 2013년 열린 '해어화' 공연에 세 예기가 무대에 섰던 바로 그날이다. 고(故) 장금도 명인(1928~2019)과 유금선 명인(1931~2014), 그리고 막내 권 명인이었다. 저 삼각편대는 예기를 아우르는 전국지도와 같았다.

술만 따르던 기녀를 '나무기생'이라고 불렀다지만 이들은 '채 맞은 생짜'로 격(格)부터 달랐다. 회초리(채)를 맞으며 배운 진짜 기생(생짜)이었다.

예기의 시간은 이쯤 시작된다.

인력거 두 대를 불러야 대문 밖을 나섰던 '군산 장금도'는 아들이 놀림을 받고 돌아오자 판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50년을 침묵하던 예기는 간청에 못 이겨 1998년 무대에 올랐고 시간을 더듬어 '민살풀이춤'이란 타임캡슐을 몸에서 꺼냈다. 시간이 역류하자 찬사가 빗발쳤다. 먼저 떠난 아들을 진혼하는 민살풀이춤마저 결국 저 '슬픈 어미' 몫으로 돌아왔지만.

동래권번 1등 예기 '부산 유금선'은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춤판에 돌아왔다. 세상은 바뀐 지 오래였다. 거역 못할 팔자라 여겨 일본 엔카(演歌), 고고, 디스코에 맞춰 기타를 치고 드럼까지 두드렸다. 그 돈으로 복요릿집을 열어 소위 '대박'을 쳤으나 독물 사고로 전 재산을 처분했으니, 인생사 '공수래공수거'였다. 단전에서 꺼낸 시름 섞인 구음(口音)도 '팔자'였던가.

이승을 등진 두 언니 뒤로 '대구 권명화'만 남겨졌다. 수양아버지인 박지홍 명창(1889~1961)에게 춤을 사사한 권 명인은 명무를 이어받았다. 박 명창의 소리 제자가 '제비 몰러 나간다!' 소리꾼 박동진 명창이었고 춤 제자는 권 명인이었다. 몌별(袂別)은 소매를 잡고 작별한다는 뜻이고, 해어화(解語花)는 '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뜻이다. 고로, 이날의 한 판 춤은 스승과 언니들에게 올리는 초혼극인 셈이었다.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뼈로 추는 춤판에 '이름난 꽃(名花)' 한 송이가 무대에 섰다. 쪽진 머리의 예기가 왼손에 소고를, 오른손에 채를 쥐자 국악당을 매진시킨 전석의 관객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허공을 진동시켰다. 분홍 한복에 꽃소매 달고 허리춤에 끈 하나 동여맨 예기가 한 번 소고를 두드리면 춤판의 소름이 객석에 밀려와 전신을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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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학년 6반'이란 고령이 무색하게도, 140㎝를 갓 넘을까 싶은 가녀린 예기가 치마를 휙 감쌀 때마다 객석이 펄럭였다. 엇갈린 왼발을 툭 하고 내려놓으면 300석이 기우뚱했고, 약조된 리듬보다 더 자연스럽게 혹자의 추임새가 날아꽂혔다.

"잘한다!" "예쁘다!"

칠흑 같은 무대, 반들반들한 검은 바닥을 명경 삼아 객석을 쥐고 흔드는 '명화'의 환영이 반사됐다. 권번에서 모진 시대를 견뎠고 한 판 춤으로 전후(戰後)의 고통을 달랬던 오래전 그 명화가 거울에서 바람처럼 웃었다. 객석은 장악당했다. 열광하는 무대를 떠나며 팔순 어르신은 양손으로 '하트'를 그리며 물러났다.

벼락같은 공연이 끝나고, 대기실에서 숨을 고르는 권 명인에게 소감을 물었다.

―믿기지 않는 에너지다.

▷저들이 손뼉 치고 흥겨워야 소고춤은 완성됩니다. 박수를 받아 춤을 '얻었으니' 내가 되레 영광이지.

―스승께서 무대 보시면 뭐라 하셨을까.

▷대동권번 시절이 생생합니다. 무대만이 행복하다 하셨을 게야.

―장금도·유금선 선생께 올리는 장엄한제(祭) 같았다.

▷두 분을 상상하며 같이 췄습니다.

이날 공연은 전국의 노름마치가 죄다 몰린 '진짜 춤판'이었다. 노름마치는 최고 전문가를 뜻하는 우리말이다.

연희단팔산대가 '판굿'의 징으로 질풍노도의 무대를 휘저었다. 여성 농악단 원년 멤버인 김정숙 여사는 징을 들고 '징하게' 놀았다. 남원 조갑녀 선생의 딸 정명희 여사의 '민살풀이춤'은 예리했다. 이승에서 저승의 틈을 벌리려는 듯 잘 갈린 비수 같은 손날로 허공을 갈랐다. 마시던 물을 바닥에 부어 양말을 적신 김운태 옹은 '채상소고춤'으로 유랑하면서 다진 상모 기예를 제대로 선보였다.

푸른 장삼을 수직으로 기립시키며 바람을 가른 국수호 옹의 '삼현 승무', 어깨를 들썩이며 좌중을 들었다 놓은 김경란 여사의 '굿거리춤', 이성훈 옹과 한국의집 예술단의 천 년 묵은 학을 무대로 옮긴 듯한 '동래학춤'도 양손, 양발에서 떨궈진 진짜배기 우리춤이었다.

헐떡이는 예인과 아쉬워하는 관객을 무대에서 겸허히 배웅하며, 진옥섭 한국문화재재단 이사장이 노름마치의 어투로 이날의 레퀴엠을 닫았다.

"생(生)은 허망한 것이라! 가난 때문에 춤판에 뛰어든 저들이 결국 인생을 예술로 살았습니다. 요번 춤판의 참맛은 저 역설 아니겠습니까?"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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