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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동물과 어우러지던 자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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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유목동물+인간-문명 2018-11` [사진 제공 = 통인화랑]


무슨 까닭일까. 야생동물과 사람, 자동차가 한데 섞여 공중에 둥둥 떠 있다. 여백을 빽빽하게 채운 무수한 색점들이 공간의 혼돈을 더한다. 게다가 한지에 그린 수묵채색화라는 사실이 더 놀랍다.

허진 전남대 교수(57)의 동양화 '유목동물+인간-문명' 시리즈가 주는 첫인상은 파격과 일탈이다. 전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일까. 서울 통인화랑 개인전에서 만난 그는 "인간과 자연의 상생과 조화, 동양화 정신을 담았다"며 부인했다.

"자동차와 비행기 등 과학 문명 혜택을 받았지만 현대인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세상에 살고 있다. 유목동물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뜻을 담았다. 모든 생명체와 사물이 부유하는 이유는 떠오르는 생각을 그려서 그렇다."

물론 그는 평생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갈등했다. 추사 김정희 수제자이자 운림산방(진도 화실)을 만든 호남 남종화 시조인 소치 허련의 5대손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조부인 남종화 대가 남농 허건에게 동양화 기본인 사군자를 배웠다.

서울에 살면서 방학 때 목포 조부집을 찾았던 그는 "할아버지는 아침 일찍 일어나 냉수욕을 한 후 밤 늦게까지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렸다. 내 그림을 보고 아무 말씀이 없었지만 조부의 태도와 자세 자체를 보고 공부했다. 아쉽게도 1987년 돌아가셔서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작가로 활동한 내 작품을 보지 못하셨다"고 말했다.

전통을 계승하자니 시대는 급변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산수화보다는 영화 등 영상매체로 쏠렸다. 그래서 한지에 현대를 담아내는 타협을 선택했다.

"동양화는 여백이 있고 함축적인데, 내 작품은 서사와 이미지를 담고 있다. 넋두리를 잘 하는 성격이라 풀어내기를 좋아한다. 현대적 동양화로 한국화를 일으키고 싶다. 동양화 정신을 기반으로 서양화 조형어법과 변화상을 그리고 싶다."

그는 1975년 조부가 개인전을 연 통인화랑에서 동학혁명을 담은 '유목동물+인간-문명' 연작, 최효찬의 자녀교육 에세이 '나에게 돌아오는 시간'에 실은 삽화 원본 등을 전시했다. 동학혁명을 이끈 전봉준과 김개남 등 이름 한자(漢字)와 창을 든 농민들, 일본 군인, 유목동물이 부유하는 그림들은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걸었다. 자연 파괴적인 제국역사관과 외세 저항적인 민중역사관이 혼재된 세상을 벗어나 대동(大同)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작가의 희망을 담았다.

'나오게 돌아오는 시간' 연작 역시 '유목동물+인간-문명' 구조와 비슷하지만 색점을 빼서 여백이 깨끗하다. 아버지와 아들의 뒷모습, 여행 트렁크, 시계, 선박, 기암절벽 등 책을 읽고 떠오른 이미지와 기억이 한데 섞여 화면을 떠다닌다.

30여 년간 전통의 현대화를 모색한 작가는 개인전 29회를 열었고, 기획전 460회에 참가했다. 문화관광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1년), 한국구상작가상(2015),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특별예술가상'(2017), 전남대 용봉학술상(2017) 등을 수상했다. 전시는 30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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