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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뭐 XX? 생활비 안 준다”…이것도 가정폭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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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비 안 주며 경제력으로 ‘통제’

전화상담 사례 성적 폭력보다 많아

신체·성·정신적 폭력 동반 호소도

가정폭력의 드러나지 않는 올가미 ‘경제적 폭력’

ㆍ생활비 안 주며 경제력으로 ‘통제’
ㆍ전화상담 사례 성적 폭력보다 많아
ㆍ신체·성·정신적 폭력 동반 호소도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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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씨는 지난해 9월 경기도의 한 가정폭력상담소를 찾았다. 결혼 생활 4년 동안 남편이 휘두른 폭력에 시달렸다. 남편은 ㄱ씨를 때리고, 물건을 내던지는 폭력을 일삼았다. 끝이 아니었다. 생활비·양육비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남편이 4년 동안 ㄱ씨에게 준 돈은 600만원 가량이다. 그마저 10회에 나눠 줬다. 월수입이 400만~500만원인 남편은 성매매와 유흥비에 돈을 탕진했다. 시간강사인 ㄱ씨는 급여를 생활비와 양육비에 다 써야 했다. 남편은 ㄱ씨가 강사 일도 못하게 하려 했다. ㄱ씨에게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생활비를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했다. ㄱ씨의 경제활동까지 통제하려 한 남편의 행위는 ‘경제적 폭력’이다. 배우자나 이혼한 상대방에게 악의적으로 생활비·양육비를 주지 않거나, 동의 없이 재산을 임의로 처분하고 수입과 지출을 독점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경제력을 수단으로 상대를 통제·제압하는 경제적 폭력은 명백한 가정폭력인데, 신체적·물리적 폭력 같은 폭력으로 잘 인식하지 않는다.

20일 여성가족부에서 운영하는 여성긴급전화 1366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접수된 가정폭력 피해 상담 18만9507건 중 경제적 폭력 피해는 5.83%(1만1037건)로 나타났다.

경제적 폭력은 다른 유형의 가정폭력과 함께 이뤄진다. 가정폭력 피해 상담 조사 중 신체적·경제적 폭력을 호소한 경우는 3041건, 정서적·경제적 폭력을 호소한 사례는 3462건, 성적·경제적 폭력을 호소한 사례는 40건으로 나타났다. 신체적·정서적·성적·경제적 폭력을 모두 호소한 사례는 3598건이었다. 경제적 폭력을 단독으로 호소한 상담 사례는 896건이었다.

경제적 폭력에 대한 상담 사례는 성적 폭력(5359건)보다 많았다. 올해 1~4월 이뤄진 경제적 폭력에 대한 상담은 전체 6만7328건 중 6.94%(4675건)를 기록했다.

경제적 폭력은 가해자의 피해자 통제 수단이라는 점에서 신체적·물리적·정서적 폭력과 구조가 같다. 지난 4월 가정폭력상담소를 찾은 ㄴ씨는 20년가량 결혼생활을 한 남편에게 당한 피해를 호소했다. 남편은 ㄴ씨에게 생활비를 주지 않았다. 화풀이였다. 휴가를 시댁에서 보내는 문제나 가사노동을 분담하는 문제로 돈과 무관한 다툼을 벌여왔지만, 그때마다 남편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생활비를 주지 않겠다”며 ㄴ씨를 억압했다.

경제적 폭력은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가해자로부터 벗어나려 할 때 끊기 힘든 족쇄가 된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소식지 ‘월간 가정상담’ 2019년 4월호에는 2002년 가정폭력을 피해 남편과 별거한 ㄷ씨(51) 사례가 실렸다. 집을 나온 뒤에도 ㄷ씨는 남편을 벗어날 수 없었다. 남편이 ㄷ씨 명의로 빚을 내면서 지난해 1월 통장이 압류됐기 때문이다. 남편이 ㄷ씨 명의로 신용카드를 만들어 낸 빚은 1억3700만원이었다. ㄷ씨는 은행에서 통장이 압류됐다는 문자를 받은 뒤에야 이 사실을 알았다. 채무를 상환하지 못한 ㄷ씨는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도움을 받아 올해 1월 가까스로 면책 결정을 받을 수 있었다.

돈으로 억압당한 피해자들

처벌 규정 없어 인지 못해

국회서 법안 1년 넘게 계류

법사위 “형사 처벌 어려워”


경제적 폭력을 처벌할 법적 근거는 부족하다. 현재 가정폭력특별법은 가정폭력을 ‘가정구성원 사이의 신체적, 정신적 또는 재산상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라고 정의하지만, 재산상 피해는 ‘재물을 물리적으로 손괴하는 행위’로 좁게 해석한다. 경제적 폭력을 제대로 처벌할 규정이 없다 보니 경제적으로 배우자를 통제하려는 행위가 심각한 가정폭력이라는 사실은 피해자들조차 잘 인식하지 못한다.

지난해 3월26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인재근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경제적 피해를 주는 행위를 가정폭력에 포함하는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1년 넘게 계류 중이다. 이 개정안은 경제적 폭력도 가정폭력에 포함된다는 점을 명확히 담고 있다.

이 법안에 대한 법제사법위원회의 검토보고서에는 부정적인 입장이 담겼다. 검토보고서는 “개정안이 가정폭력의 범위에 포함시키려는, 생활비를 주지 않거나 수입과 지출을 독점하여 가족구성원을 방임하는 등의 행위는 그로 인하여 가정구성원에게 경제적 피해를 입게 한다고 하더라도 단순 채무불이행을 범죄로 처벌하지 않는 현행법 체계 아래에서 가정폭력범죄로 성립한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했다.

가정폭력으로 처벌하려면 형법에 열거된 폭행·강간·상해 같은 범죄를 저질러야 한다. 경제적 폭력에 따른 피해는 채무불이행 등 민법상의 재산상 피해로 분류된다. 현행법 체계에서 경제적 폭력은 가정폭력특별법으로 규정하려 해도, 형법상 경제적 폭력을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없다면 형사처벌 대상으로 보기 힘들다는 의미다.

국회 입법조사처 관계자는 “ ‘생활비를 안 줘서 피해를 봤다’고 했을 때 그 피해를 보전하는 방법이 형사 처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고 했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경제적 폭력을 법적으로 명확하게 가정폭력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서경남 한국여성의전화 쉼터 오래뜰 소장은 “신체적 폭력에 국한된 가정폭력 정의를 정서적·경제적 폭력으로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했다.

박채영 기자 c0c0@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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