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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김대중과 이희호, 그들이 ‘사랑하고 존경했던’ 7가지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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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22년 태어난 이희호 여사는 대표적 여성운동가로 활동하다 1962년 고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해 정치적 동지로서 격변의 현대사를 함께했다. 사진은 1962년 이희호 여사와의 결혼식장에서 입장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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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는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동지이자 반려자였다. 정치인 김대중이 가는 길에는 풍운이 일었지만 아내 이희호는 동요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아내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협박과 유혹을 뿌리쳤다”며 “아내가 없었으면 나도 없었다”고 토로했다. 이희호는 정치낭인, 대통령 후보, 야당 총재, 국가 반란의 수괴, 망명객, 민주투사의 아내여야 했다. 김대중의 망명, 연금, 투옥 등 민주화 여정에 동참해야 했다. 사형수에서 대통령이 되는 현대사의 기적 속에는 이희호의 지혜와 눈물과 기도가 있었다. 김대중을 떠나보낸 이희호 여사는 홀로 남편의 유지를 받들며 10년 동안 담대하고 의젓하게 어른의 자리를 지켰다. 김대중과 이희호의 존경하고 사랑했던 7가지 일화를 뽑아서 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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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유엔 총회에서 기조 연설하는 이희호 여사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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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바라지

김대중은 독재와 싸우다 6년 넘게 옥에 갇혔다. 이희호의 옥바라지는 눈물겨웠다. 겨울이 와도 방에 불을 넣지 않았다. 남편이 추운 감방에서 떨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따뜻하게 지낼 수 없었다. 이희호는 날마다 기도를 올렸다. 어느 날은 냉방에서 꿇어 엎드려 기도하다가 혼절한 일도 있었다. 세탁물을 받아 손빨래를 하고, 속옷과 양말까지 다림질을 해서 향수를 뿌려 들여보냈다. 남편이 원하는 책이면 어떻게든 구했고, 남편의 석방을 위해서는 어떤 사람도 만났다.

1981년 1월 김대중을 면회 간 이희호는 아들들과 함께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사형수 남편을 향한 눈물의 기도는 절절했다. 김대중은 그때만큼 아내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가족의 믿음과 사랑이 없었더라면 나는 20년을 넘게 지속된 고난을 결코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중심에는 아내가 있었다.”

옥중서신

이희호는 김대중에게 날마다 편지를 썼다. 하지만 김대중은 한 달에 한 번밖에 편지를 쓸 수 없었다. 편지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당신에게’로 시작되었다. 사연은 길고 봉함엽서는 달랑 한 장이었으니 글씨를 작게 써야 했다. 엽서 한 장에 1만4000자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 확대경 없이는 읽을 수도 없었다.

이희호의 편지는 세상의 소식을 날라다 주었고, 인내와 용기가 솟아나게 했다. “당신도 나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형제들이 철야 기도, 산 기도, 골방 기도, 금식 기도까지 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만일 당신이 이렇게 큰 어려움에 처해 있지 않았다면 누가 그렇게까지 어려운 기도를 드리고 있겠어요. 내일에 대한 희망을 꼭 가지세요.”

정계은퇴 전야

14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은 김영삼에게 졌다. 1992년 12월 19일 새벽 3시 김대중은 일어나 불을 켰다. 그리고 기도를 올렸다. 아내 이희호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김대중이 입을 열었다.

“민주주의와 정의와 통일을 위해 나는 모든 것을 바쳤소. 나의 이런 노력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잘 알 것이오. 그런데도 다시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했소.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소. 결연하게 정리하려고 하는데 당신도 동의해 주었으면 좋겠소.”

이희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러운 새벽이었다. 남편은 생각을 가다듬고 아내는 구술을 기다렸다. 이희호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은퇴성명은 이렇듯 눈물로 작성되었다. “저는 오늘로써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시민이 되겠습니다. 이로써 40년의 파란 많았던 정치생활에 사실상 종말을 고한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하해 같은 은혜를 하나도 갚지 못하고 물러나게 된 점 가슴 아프고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제 저는 저에 대한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조용한 시민생활로 돌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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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희호 여사가 2015년 8월 5일 전세기를 이용해 서해 직항로로 북한을 방문할 당시 모습. 이 여사는 비행기 탑승 전 취재진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김영민 기자


대통령 퇴임 직전

2003년 2월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민주당과 자민련 의원들을 초청해 만찬을 할 때였다. 이희호가 처음으로 대통령직 퇴임을 앞둔 남편 얘기를 했다.

“남편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남편이지만 저도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제가 옆에서 지켜본 바에 의하면 항상 밤잠을 설쳐 가면서 나라와 민족을 진심으로 사랑해온 것만은 사실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남편을 보면서 이희호는 남편보다 먼저 잠들지 않았다. 남편이 잠자리에 들어야 비로소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도를 드렸다. 이희호는 새벽까지 보고서를 읽고 읽는 남편에게 호소했다. “제발 오늘 안에 주무세요.”

퇴임 후 항거

김대중과 이희호는 이명박 정부의 폭주에 분노했다. 아내 이희호와 분연히 맞서자고 손을 잡았다. 일기에 이렇게 썼다. “아내와 같이 다짐했다. ‘우리가 정치에서 은퇴한 지 오래지만 오늘의 현실 즉 반민주, 반국민경제, 반통일로 질주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 50년간의 반독재투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형, 학살, 투옥, 고문을 당하면서 얻은 자유이고 남북화해였던가! 그 자유와 남북화해가 무너지고 있다. 늙고 약한 몸이지만 서로 비장한 결심과 철저한 건강관리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오늘의 역주행 사태를 보면 지하의 열사들이 고이 잠들지 못할 것 같아 가슴 아프다.”(2009년 2월 23일 일기)

김대중은 잠자리에 들기 전 아내 이희호의 손을 잡고 함께 기도를 올렸다. 침대 위의 기도는 세상을 뜰 때까지 거르지 않았다.

동행의 행복

퇴임 후 동교동에는 소소한 행복이 찾아왔다. 아내와 함께 있으면 그저 좋았다. 일기에는 정과 사랑이 듬뿍 들어 있다. “나는 행복하다. 아내가 나(보다) 먼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내 없는 삶이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점심 먹고 한강변을 아내와 같이 드라이브했다. 요즘 아내와의 사이는 우리 결혼 이래 최상이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내 없이는 지금 내가 있기 어려웠지만 현재도 살기 힘들 것 같다.”

김대중은 아내에게 농담을 자주 건넸다. 다소 썰렁해도 이희호는 크게 웃었다. 늦은 밤 침대에 걸터앉아 노래를 불렀다. <고향의 봄>과 <사랑으로> 노래가 밖으로 새어나왔다. 듣고 있는 비서들도 행복해졌다.

이별 그리고 재회

2009년 여름 김대중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신촌세브란스에 입원했다. 한여름인데도 손발이 차디찼다. 아내가 털장갑과 털양말을 짜서 끼워주었다. 8월 18일 이희호가 남편의 손을 잡았다. 마침내 거인의 심장이 멎었다. 이희호는 마지막 편지를 써서 관 속에 넣었다. 역시 ‘사랑하는 당신에게’로 시작되었다.

“같이 살면서 나의 잘못됨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늘 너그럽게 모든 걸 용서하며 아껴준 것 참 고맙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의 품안에서 편히 쉬시기를 빕니다. 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잘도 참고 견딘 당신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그리고 10년 후 이희호는 2019년 6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하늘나라에서 남편이자 동지인 김대중을 만나 세상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김대중과 이희호, 참으로 아름다운 부부를 우리는 역사에 묻는다. 두 분은 우리 시대의 별이었다. 하늘에서도 우리의 갈 길을 비춰주실 것이다.

김택근 시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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