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5 (일)

남성·해외파·서비스업… 스타트업 공식 깬 '닥터 신데렐라'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아무튼, 주말] 아시아의 청년 리더 금도희 버블러 대표

'당뇨 환자의 혈당을 체크하는 콘택트렌즈, 이산화탄소가 발생해 혈관이 막히지 않도록 해주는 스텐트, 마이크로 니들(바늘)을 이용해 절개하지 않아도 되는 내시경….'

금도희(28) 버블러 대표가 포항공대(포스텍) 석·박사 과정 5년 동안 연구·개발해 특허를 받은 아이템이다. 이 중 콘택트렌즈와 스텐트는 상용화가 진행 중. 금 대표는 이런 연구를 인정받아 지난 4월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발표한 '2019 아시아의 30세 이하 30인 리더'에 아이돌그룹 블랙핑크, 축구선수 조현우 등과 함께 선정됐다. 창업한 회사 '버블러'는 금 대표의 스텐트에서 거품이 보글보글 나온다는 점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조선일보

“운이 칠, 타이밍(timing)이 삼이었다고 생각해요.” 아직 학생 티를 벗지 못한 금도희 버블러 대표는 창업 성공 비결을 묻자 수줍게 답했다. 이 젊은 여성 과학자는 아이템 3개를 성공시키기 위해 50개를 시도하고, 하루 3시간 이상 자지 않으며 운동도 하는 등 자기 관리에 철저하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국내 스타트업 업계를 세 단어로 요약하면 '해외파, 남성, 서비스업'이다."

업계에 있는 한 관계자가 농담처럼 한 말이다. 하지만 이는 삶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켜주는 여성 창업자의 등장에 목말라 있음을 보여주는 반어적 표현이기도 하다. 피 한 방울로 모든 질병을 알 수 있다고 한 엘리자베스 홈스 테라노스 창업자의 말이 4년 전 사기로 들통났을 때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분노가 폭발했던 건 그만큼 기대가 컸기 때문이 아닐까.

포브스 명단에 오른 한국인 중 금 대표를 만나고 싶었던 건 이런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는 현재 버블러 대표를 하며 LG이노텍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지난 15일 오후 8시 만난 그는 앳된 얼굴의 여대생 같았다. 연구소 근무 중에는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그는 밤에는 미국시간에 맞춰 버블러 일을 한다고 했다.

―왜 미국 시간인가요?

"버블러 사무실이 미 서부에 있어요. 한국이나 아시아는 의료 기기 시장이 작고 (상용화나 실험 등에) 보수적이거든요. 스텐트는 혈관에 넣는 의료기기라 임상 기간이 10년 정도로 굉장히 길어요. 그 이후에도 된다는 보장은 물론 없고요. 가능성을 10% 정도로 보고 조금씩 개척하고 있어요."

―회사에 다니면서 개인 사업을 하는 게 가능한가요?

"그럼요. 요즘은 회사 다니면서도 창업하라고(사내 벤처) 장려하는데요. 미국에 있는 친구가 많이 도와주기도 하고요. 제가 박사과정 졸업할 때 입사 제안을 받은 곳이 SK하이닉스,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LG전자 등 11곳이었어요. 전 그중 제일 작은 회사라고 할 수 있는 LG이노텍을 선택했어요. 다른 회사들이 반도체 공정 등 남들이 따라 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대량생산하는 경우가 많다면, 여긴 작은 걸 다루는 부품 기업이라 특이한 기술이 많다고 느껴졌거든요. 그걸 의료기기 쪽으로 살리고 싶어서 입사했어요. 개발되는 기술은 회사와 공유하고요."

―스텐트는 이미 시중에 많이 나와 있는데요.

"스텐트는 몸에 이물질로 작용해 염증 반응이 일어나 결국 막혀요. 그래서 최신 버전은 약물을 방출하는 거예요. 그런데 약물도 정상 세포를 죽이는 부작용이 있어요. 제 것은 스텐트 표면에서 이산화탄소 거품이 발생해 부작용 없이 혈관이 막히는 걸 잡아줍니다. 밖에서 초음파 기기 등으로 관찰도 쉽고요."

―그 외에도 스마트 콘택트렌즈, 특수 내시경 등도 발명했지요.

"콘택트렌즈는 초소형 마이크로 발광다이오드와 광검출기가 장착돼 있어서 눈을 감기만 하면 각막과 눈꺼풀 안쪽 혈관을 분석해 혈당을 측정하는 거예요. 이건 학교 측이 50% 정도의 지분을 갖고 있어서 학교 차원에서 상용화를 준비하고 있어요. 마이크로 니들을 사용한 내시경은 아직 초기 단계고요."

―이런 아이디어들을 어떻게 생각했나요?

"석·박사 논문 써보겠다고 이리저리 찾다가 하나 건진 거예요. 5년 동안 50개 넘는 아이템을 실험하고 제품 개발 시도도 해보면서…. 아이템을 생각할 때는 부모님과 관련된 걸 많이 해요. 지금 편찮으신 건 아니지만 나이가 드실수록 혈압 관리, 혈당 관리를 해야 하잖아요. 어떤 게 부모님이 건강하게 오래 사시는 데 필요할까를 생각하면서 아이디어를 내요."

―실패한 것 중에는 어떤 게 있나요.

"호흡을 통해 병을 진단하는 센서를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실패했어요. 기술적인 한계가 너무 크더라고요. 아버지가 담배를 자주 피우시거든요. 실험을 6개월 정도 했는데 실패했어요. 그런데 전 이걸 실패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아이템이 A, B, C가 있다면 각각 다른 게 아니고 연관돼 있거든요. 아이템 하나를 실패해도 조그만 부분을 다른 곳에서 쓸 수 있으니깐 낭비가 아니에요. 이 세 개를 만들기 위해 조금씩 피라미드를 쌓아 온 거죠."

조선일보

미 경제지 포브스 홈페이지에 올라온 금도희 버블러 대표의 프로필. 지난달 포브스가 선정한 ‘2019 아시아의 30세 이하 30인 리더’에서 헬스케어 앤드 사이언스(보건) 부문에 선정됐다. / 포브스 캡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창업은 어떻게 하게 됐나요?

"저는 '운(運)칠타(타이밍·timing)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박사 과정을 할 때 한창 창업 붐이 일어났어요. 대회도 많이 열리고. 그러다 보니 대회 좀 나와 달라는 주최 측 전화 받는 게 일이었어요. 그래서 나가면 1등 아니면 2등 하고. 너무 초창기다 보니 어린 친구들이 개발한 건 아직 조금 수준이 낮은데, 저는 몇 년 동안 연구했던 내용을 발표하니깐. 그런데 또 그 아이템들이 독특하다 보니 창업 제안이 쏟아진 거지요."

―창업 지원금이 그런 식으로 몰리면 잘못 지원되는 경우도 많지 않나요?

"지금 이 바닥이 거짓 정보나 과장된 말을 해 창업 지원금을 받는 게 굉장히 쉬워요. 심사위원들이 내용을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말만 잘하면 그들을 혹하게 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러면 돈 빨리 당기고 그럴 수는 있겠지만. 저는 그런 거에 엮이는 게 싫었어요. 제가 처음에 10년이 지나도 상용화가 안 될 수 있다고 말씀드린 게 그래서예요. 솔직하게 말하면서 천천히 가려고요. 지금 과장해서 시작한 친구들은 나중에 다 들통나지 않을까요?"

―부산과학고부터 엘리트 코스로 살았습니다. 스스로의 결정인가요?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강제로 공부했어요. 영어도 영어 유치원 나왔어요. 학원을 너무 많이 다녀서 초등학교 때 집에 오면 자정, 중학교 때는 새벽 2시였어요. 부모님이 자영업 하시는데 저한테 생활비의 80%를 투자하셨어요. 제가 외동딸이거든요. 그런데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스스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과학고에 가기로 돼 있었는데, 가면 잘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하니깐. 여기까지 왔는데 공부 못하면 이도 저도 안 되잖아요. 부모님이 제게 투자하신 것도 다 날리는 거고."

―과학 영재들이 최근 과학자보다 의사를 택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제 친구 절반이 의사예요. 저는 세상에서 제일 의미 있는 일이 사람을 살리는 거고, 둘째가 사람이 사는 걸 편안하게 해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의사들은 너무 힘들게 일하잖아요. 저는 아픈 사람 보면 저도 아플 것 같아서."

―너무 굴곡 없이 산 것 같아요.

"한번은 상담실을 다닌 적이 있어요. 누가 제게 일 중독이라며 권하더라고요. 그런데 상담실에서 말하기를 전 스트레스 지수보다 그걸 이겨내는 지수가 높아서 괜찮대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재미있는 삶요. 라켓볼 선수도 되고 싶고, 사랑도 하고 싶어요. 영화 '타이타닉'에 나오는 주인공이 하는…. 이상형은 정해인이에요."

―국가적인 인재인데 너무 개인적인 삶을 꿈꾸는 건 아닌가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덜 경쟁적인 사회에서 살게 해주는 배경 같고요. 스스로를 위해 사는 삶이 나라를 위하지 않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금 대표의 몸에는 4개의 헤나(문신의 일종)가 있다. 전교 1등을 할 때마다 부모님과 거래해 받아낸 헤나라고 했다. 매일 3시간 자면서 네일케어 수업도 1시간씩 듣는다고 했다. 그걸 왜 배우느냐는 질문에 한마디로 답했다. "재밌잖아요."

[이혜운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