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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화)

[매경데스크] 기업 압수수색이 일상이 된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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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경영이 어려운 것은 미래 불확실성 때문인데, 요즘은 과거 불확실성이 문제다."

기업이 노하우를 쌓으려면 기록이 중요하다. 사람 기억에 의존해서는 시행착오의 경험이 축적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사에서도 미주알고주알 세세하게 적어놓는 것이 나중에 도움이 될 때가 많다. 그런데 그러한 기록들이 훗날 불이익의 근거로 활용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든다면 어떻게 될까. 일단 만들어진 기록은 함부로 지우거나 바꿀 수 없으므로 기업 종사자들은 찜찜함을 없애기 위해 아예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애당초 불법 또는 편법의 소지가 있는 일은 하지도 말고, 기록하지도 않으면 된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면 안 된다. 미래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점과 상황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잣대로 과거 기록이 재단될 수 있다는 공포심이 발동되면 사람들은 기록을 멈추게 된다. 그게 인지상정이다. 얼마 전 만난 기업인은 이런 현상을 '과거 불확실성'에 대한 회피 심리로 표현했다. 허구한 날 압수수색이 벌어지는 대한민국에서, 기업들이 처한 어이없는 상황이다.

민간기업에 대한 압수수색은 필연적으로 기업 활동 위축과 신뢰도 하락을 유발하게 된다. 기업은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 안달하느라 본업을 소홀히 하고, 일반 대중은 특정 기업에 대해 '뭔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저러겠지'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반기업 정서를 부추기는 불쏘시개다. 이런 과정에서 기업은 손해를 보고, 기업인이 다친다. 경제 하려는 의욕이 꺾이게 된다. 이래저래 최종적 피해는 국민이 뒤집어쓴다.

한진그룹이 겪은 잔혹사가 그런 예다. 도대체 몇 번의 압수수색이 이뤄졌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할 정도로 무지막지했다. 회사 측 집계와 법조계 풍문, 신문 기사에 등장한 횟수가 조금씩 다르다. 한진그룹이 각종 논란에 휩싸인 2014년 이후 대략 20회 이상의 압수수색이 이뤄졌다는 어림짐작이 있을 뿐이다. 확인된 것만 총 11개 기관이 압수수색을 했다고 하니 국가 공권력이 총동원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 조양호 한진 회장은 이런 무지막지한 공권력의 파상공격 와중에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특정 민간기업을 탈탈 털어 얼마나 심각한 범죄 행위를 밝혀냈는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사법부의 최종 판단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필자가 더욱 강조하고 싶은 건 덜해지기는커녕 점점 심해지는 듯한 경향성이다. 한진그룹뿐만 아니라 30대 대기업의 대부분이 최근 1~2년 사이에 압수수색 폭탄을 얻어맞았다. 그러면서도 막연하게나마 '언젠가는 수그러들겠지'라는 기대감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최근에는 그런 기대감마저 사라지는 분위기다. 한 기업인은 "과거에는 압수수색 영장 기각률이 높았고, 장소 등 요건도 엄격했지만 요즘은 그렇지도 않다. 법원도 손을 놓은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가 그러한지는 정확한 통계로 세심하게 따져봐야겠지만, 어쨌든 요즘 기업인들이 느끼는 정서는 이런 수준이다. 현재 사법 시스템과 관행에 대해 근본적 회의감이 배어 있다.

삼성그룹의 예를 들어보자. 2018년 삼성 계열사는 무려 13차례의 압수수색을 받았다. 2017년 2차례, 2016년 4차례에 비해 크게 늘어난 숫자다. 매달 한 번 이상 압수수색을 받았으니 사람들은 이를 좀처럼 깨지지 않을 대기록으로 생각했다. 앞서 거론했던 '언젠가는 수그러들겠지'라는 기대감과 같은 맥락이었다. 그런데 그게 큰 착각이었을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올 들어 5월이 다 가지도 않았는데 삼성 계열사는 총 9번의 압수수색을 당했다. 얼추 한 달에 두 번꼴이다. 올해 말까지 몇 번이 더 추가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검경 수사권 조정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논쟁의 핵심 포인트는 국민 개개인의 인권 보호다. 그런데 민간기업의 경제 할 권리도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됐으면 한다. 수사기관이 제 집 드나들 듯 수시로 민간기업을 뒤지는 나라에서 어떤 회사인들 버텨내겠는가. 이제는 제도적 보완 장치를 고민해야 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

[이진우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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