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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뚝 근육 닮은 오래된 간판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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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전현주 기자의 서울 간판 기행-을지로 산업 특화 거리를 중심으로

40~50년 전 붓으로 쓰던 간판쟁이

을지로 주변 간판은 다 썼다

모던하면서도 획일적인 유럽풍인

서울시 시범 간판보다 서울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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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간판도 한 40~50년 훌쩍 넘었죠. 제가 여기 자리잡았을 때 내걸었던 간판이니. 그땐 붓으로 간판 쓰는 사람이 한 분 계셨어요. 그분이 이 을지로 주변 간판을 다 쓰셨을 거예요. 지금 어디 계시냐고? 한참 안 보여요. 눈에 안 보이면 돌아가신 거야. 참 옛날 일이니까.”

지난 20일 낮 1시 을지로 공구상가 골목으로 들어갔다. 3년 만에 다시 마주친 ‘원옥철강상사’ ㄱ씨가 잠시 기계 스위치를 끄고 간판을 쳐다봤다. 그동안 칠은 조금 더 벗겨졌다. “아무래도 오래됐으니까.” ㄱ씨가 머쓱하게 웃었다.

을지로 공구거리 상인들의 ‘간판’ 자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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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은 투박하지만 눈은 ‘익숙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을지로 산업 특화 거리 제조업자들이 가게 간판에 은근한 자부심이 있다는 건 지난 3년 동안 틈틈이 한 ‘골목 탐방’에서 얻은 결론이다. 가령 중구 산림동 조각 특화 거리 쪽에 즐비한 기계를 촬영하러 들어갔다가 만난 ‘성문유리’의 ㄴ씨는 “우리 집 간판 먼저 찍어달라”며 바깥으로 걸어나왔다. 이미 폐허나 다름없이 변한 가게들을 지나 좀더 깊숙한 골목에 자리한 ‘양일공사’의 ㄷ씨 역시 “잊혀지기 전에 우리 집 간판을 찍어보라”고 기자에게 정중히 요청했다.

적게는 30년부터 많게는 50년 가까이 한자리에서 가게를 지탱해왔으며 “당당하게 일해왔다”고 말하는 이력이 서로들 같았다. ㄴ씨와 ㄷ씨는 “인화한 사진을 가져다줄 수 있느냐”는 요청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60여 년 흔적이 쇳가루처럼 묻어나는 을지로 골목은 바깥세상과 또 다른 속도로 희미한 맥을 이어왔다. 을지문덕 장군의 성에서 따온 ‘을지로’는 광복 후 얻은 지명인데, 을지로 일대에 조성된 산업 특화 거리도 한국전쟁 이후 무너진 도시를 재건하던 무렵 탄력을 받고 호황을 누렸다.

1970년대 한창 전성기를 누릴 때 자리한 공업사와 철공소 같은 제조업체들은 산업구조가 바뀐 지금까지도 기계를 멈추지 않고 외부 주문을 받는다. 젊은 예술가들이 새로 자리잡아 을지로가 ‘힙스터 성지’로 이름난 일은 비교적 최근이다. 여기 서울시의 ‘청계천 을지로 일대 재개발 사업’ 논란이 불붙어 오가는 사람이 늘었다.

골목마다 모 굵은 붓으로 휘갈긴 간판은 을지로의 지난 시절을 박제해서 전하는 듯하다. 산림동 등지에서 ‘시보리’와 ‘로구로’ ‘빠우’ 등을 하는 어르신들은 최소 30년 이상 이 골목에서 밥을 먹었다. 울긋불긋한 간판 글자들은 생존 투쟁을 해온 가장들의 팔뚝 근육을 닮아 울퉁불퉁하고 힘이 넘친다.

시보리: ‘눌러 짠다’는 뜻의 일본말. 원형 금속판을 선반 틀에 고정시켜 고속 회전하며 눌러 모양을 만드는 과정
로구로: ‘녹로’의 일본식 발음. 재료를 축에 붙인 뒤 회전시켜 성형이나 표면을 가공하는 방법. 물레, 선반이라고도 한다.
빠우: ‘부드럽게 만든다’는 buff(버프)의 일본식 표현. 스테인리스와 같은 제품의 광을 내는 작업을 말한다.

<글자 풍경>(을유문화사 2019)을 쓴 디자이너 유지원이 ‘글자가 가질 수 있는 힘'을 나열한 바에 따르자면 “싱싱한 생명의 피처럼 기계를 돌리는 기름 냄새가 풍기고, 기계의 견고한 육신이 장인들의 노동과 온기에 힘입어 삶의 온도를 생생히 유지하는 곳”으로 을지로의 장소성을 표현한다.

을지로 간판들은 “못 만드는 게 없던” 을지로의 황금기를 돌아보게 만든다. 지금 그 동력은 한풀 죽었지만 “도면만 있으면 땅크까지 만들었다”는 검증 못할 자랑이 넘나들었던 서울 근현대사, 한 시절 가열차게 굴러간 도시의 표식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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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이 자주 바뀌는 길은 수상하다

간판은 도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꼽힌다. 간판만 봐도 도시 행정과 동네 정서가 두루 잡힌다. 서울도 마찬가지다.

서울에서 간판은 ‘도시 미관을 해치는 해악’으로 여겨왔는데, 미학도 일관성도 없고 우후죽순 제멋대로 설치한 데다가 디자인이 천박하다는 점이 이유다. 서울시는 2008년부터 ‘간판 개선 시범 사업’을 벌여 간판을 개선해왔다. 해마다 개선 우수 사례를 꼽아 ‘서울시 좋은 간판’ 누리집에 소개한다. 그 가운데는 개선 전이 가게와 더 잘 어울린다는 평을 듣는 경우도 있다. 종로구 삼청동길의 상징 가운데 하나였던 ‘삼청동 수제비’처럼 말이다. 간판 개선 후 앙증맞은 글자를 받으며 젊어졌지만, 기존의 빛바랜 서체에 묻어난 가게의 역사와 운치가 실종됐다.

시인 오규원이 일찌감치 그의 시 <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에서 “서울은 어디를 가도 간판이 많다”며 “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 자세히/ 보라 간판이 많은 집은 수상하다”고 토로한 적 있다. 이제 이 문장을 조금 바꿔 ‘간판이 자주 바뀌는 길은 수상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서울에서 간판이 수시로 바뀌는 곳은 고질적인 젠트리피케이션 바람으로 투기 열풍이 거센 지역, 도시 재개발이나 도시 재생 사업 실행이 예정된 곳이다. 익선동과 성수동, 가로수길에서 출발한 가지각색 길거리 간판이 수시로 바뀐다. 을지로 역시 일대의 자부심이 한풀 꺾인 지금, 상인들은 전과 달리 본인의 이름 석 자 밝히기도 꺼리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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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을 관찰하며 ‘서울다운 서체’를 찾아 걸어보는 일은 서울을 여행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일 듯하다. 대림동과 구로동 사이에 있는 간판들과 방배동 방배 사이길의 간판들은 서체부터 생김새까지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시장이지만 중국 동포를 비롯한 중국인 집단거주지가 형성된 남구로시장의 간판은 대륙에서 공수한 식재료, 인력과 구인 공고 등 알림이 국한문혼용으로 가득하다.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찾는 동대문시장 중앙아시아 거리 쪽 간판들은 서울 속 오랜 타향살이에 젖은 서민들 애환까지 전달한다. 모두 저마다 삶을 품은 서울의 글자들이다.

‘서울다움’을 생각하는 간판 여행

서울시는 도시 경관을 개선하기 위해 해마다 ‘좋은 간판 공모전’을 연다. ‘개성 있는 간판’ ‘아름다운 간판’ ‘조화로운 간판' 세 가지 기준을 충족한 간판을 뽑아 상을 주고, 비슷한 디자인의 간판 설치를 독려한다. 최근 5년 동안 수상한 간판을 보면 하나같이 ‘모던’하고 ‘심플’한 기운 일색이다. 글자는 더 앙증맞게, 서체는 더 간단하게, 때때로 ‘픽토그램’(단순한 그림 문자)이 등장해 글자를 대신한다.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기시감이 든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서울시 좋은 간판 누리집’에서 소개하는 ‘좋은 간판’ 선례 사진을 보면 답이 나온다. 선례의 출처가 모조리 유럽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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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간판을 관찰하다보면 서울시의 ‘간판 개선 지향점'이야말로 획일적으로 보인다. 프랑스 니스와 아비뇽, 이탈리아 밀라노, 스위스 제네바, 영국 런던, 스페인 마드리드, 그리고 동유럽 유명 거리의 간판을 굳이 서울에 이식할 필요가 있을까. 서울시 간판 개선 시범 사업 12년 차, ‘도시 경관을 살린다’는 미명 아래 오히려 ‘서울다움’이 사라지는 듯하다. 40~50년 을지로 거리를 지켜온 간판 글씨가 ‘서울시 좋은 간판상’을 받은 역대 간판들 그 이상으로 ‘울림과 개성’이 엿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 아닐까.

소설가 공선옥은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당대, 2005)에서 한국 간판 문화에 대해 속 시원한 한마디를 적었다.

“나는 속이 상한다. 우선 형형색색의 어지러운 간판에 대하여. 그 간판들을 내놓아야만 하는 사람들의 각박한 삶에 대하여. 그러나 정말 내 오장을 상하게 하는 것은 생존의 깃발 펄럭이는 거리와 그 거리의 사람들에 대하여 한 번이라도 연민이나 애정을 가져 보지 않고 그곳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말하는 방식’이다.”

글·사진 전현주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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