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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흑돼지쇼’는 달리기 지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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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노예 동물들의 섬’ 제주

③ 흑돼지·거위들의 아찔한 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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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동물들의 섬, 제주]

① 19년 동안, 두발로 서고 구르고…쇼장의 코끼리들

② ‘돌고래 체험’ 어디에도 교감은 없었다

③ 흑돼지·거위들의 아찔한 질주

돼지는 개보다 똑똑하다. 돼지의 지능(IQ)은 평균 75~85다. 평균 지능 60인 개보다 높고, 3~4살 아이의 지능과 비슷하다.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개보다 후각도 발달했다. 후각수용체 유전자 수가 1301개로, 1094개를 가진 개보다 많아 송로버섯을 찾는 훈련을 받는 돼지들도 있다.

그런 흑돼지가 미끄럼틀에서 혼비백산 미끄러지고 있었다. 당장 나뒹굴어도 이상하지 않을 경사로를 돼지들이 우르르 달려 내려왔다. 돼지들은 왜 미끄럼틀에 올라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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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져, 만져!”


노동절인 지난 5월1일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휴애리 자연생활공원’(이하 휴애리)에는 가족 단위 방문객들로 북적였다. 탐스러운 수국길이 펼쳐진 2만여평 면적의 공원에는 ‘인생 사진’을 찍기 위해 성능 좋은 카메라와 삼각대를 챙겨 나들이 나온 연인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꽃길을 따라 공원 입구로부터 5분여를 걸어 올라가자 토끼나 염소에게 당근을 줄 수 있는 먹이 체험장과 승마체험장이 나타났다.

제주 전통 가옥 형태의 갤러리와 카페 근처에 마련된 ‘동물 체험장’에는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특히 아기 흑돼지 교감체험장은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좋아 보였다. 낮은 돌담으로 둘러쳐진 체험장 안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아기 돼지들과 아직도 젖이 퉁퉁 불어있는 엄마 돼지가 한 우리에 있었다. 안내문에는 ‘직접 안에 들어가서 가깝게 아기흑돼지와 교감해보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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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져, 만져.” 사진을 찍기 위해 우리 안에 들어간 어른들은 새끼 돼지와 아이들을 한장에 담기 위해 가까이 가 만져보라고 권하고 있었다. 아기 돼지들은 한 번이라도 더 젖을 물려고 엄마 돼지를 따라다니고, 어린이들은 그런 아기 돼지를 만져보려고 쫓아다니는 형국이었다.

‘아프리카돼지열병 예방’을 위해 돼지 먹이주기 체험을 임시 중단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지만, 관람객들은 무인판매대에서 산 당근을 돼지들에게 내밀며 가까이 유인했다. 이를 제지하는 관리 인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교감을 ‘당하는’ 돼지들은 아무렇지 않을까. 자연양돈 농장을 운영 중인 김성만 하하농장 대표는 “새끼 돼지들이 얌전히 있는 것이 신기하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노출되서 스트레스에 무뎌진 것 같다. 우리농장의 경우, 대여섯달 된 아기돼지들도 인기척을 느끼면 달아나고 경계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낯선 사람들이 어미돼지와 새끼가 같이 있는 곳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다. 실제 농장에서는 몸무게가 200kg에 육박한 돼지들이 궁지에 몰리면 사람을 치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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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에 구르고 넘어지는 흑돼지들


오후 3시 정각이 가까워져 오자 교감체험장, 카페 등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모두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무리를 따라 들어가니 고소한 빵 냄새가 먼저 관광객들을 맞았다. 공연장 입구서 파는 팥소가 든 흑돼지 모양 빵 냄새였다. 돼지 모양 간식은 ‘흑돼지 쇼’가 휴애리의 특색품임을 짐작게 하는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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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돼지야 놀자’(Black Pig Show) 안내문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매시간 정각에 하루 8번 쇼가 진행됨을 알리고 있었다. 공연장에 들어서자 80여명이 앉을 수 있는 수 있는 좌석은 이미 관람객이 빼곡히 들어찼고, 뒤늦게 들어온 30여명 등은 공연장 펜스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요란한 음악 소리와 함께 전면 전광판에서는 휴애리와 흑돼지에 대한 안내방송이 2~3분간 이어졌다.

“빨리 나와라.” 안내방송이 시키는 대로 어린이 관람객들이 소리를 치자, 드디어 한 무리의 흑돼지가 나타났다. 30여 마리의 어린 흑돼지들은 검은 엉덩이를 씰룩이며 가파른 계단을 서슴없이 올라갔다. 계단을 빠르게 오른 흑돼지들은 족히 5m는 돼 보이는 높은 곳에 다다라 아슬아슬한 다리를 건너 미끄럼틀로 달려갔다. 미끄럼틀에는 돼지들이 잘 미끄러지도록 물이 흐르고 있었다.

돼지들은 오를 때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65도의 경사로를 미끄러져 내려왔다. 흑돼지 행렬에 여기저기서 관람객들의 환호가 흘러나왔다. 돼지들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미끄럼틀에 도착하자 익숙한 듯 아래로 달려갔다. 중심을 잡기 위해 앞발을 밀착시키면서도 미끄러운지 뒷발을 버둥거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넘어질 새도 없이 아찔한 속도 미끄러진 흑돼지들은 미끄럼틀 아래 고인 물보라를 맞으며 먹이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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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거위가 등장했다. 흑돼지와 마찬가지로 거위들은 관리인의 지시에 따라 계단을 올라 미끄럼틀로 향했다. 거위들은 두 발로 중심을 잡기 힘든지 날개를 활짝 펼친 채 한 발로 중심을 잡고, 다른 발로 조금씩 밀며 내려왔다.

발을 떼기가 두려운지 미끄럼틀 앞에서 계속 주저하는 거위도 눈에 띄었다. 몸을 내던진 거위들이 달려간 곳도 먹이가 있는 곳이었다. 흑돼지, 거위 쇼가 진행된 것은 2~3분 남짓. 이 모습을 보려고 공원 방문객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이 허무할 정도였다.

지난 2007년 시작된 ‘흑돼지 쇼’는 지난 10여년 동안 여러 방송에 소개되며 인기를 얻었다. 대나무 산책로, 매화동산 등 다양한 식물들과 제주의 옛 모습을 재연해 놓은 휴애리가 자연학습체험이라는 이름으로 ‘돼지의 묘기’를 선보이는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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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상태의 동물 보여주는 것이 교감 체험”


휴애리 쪽은 2012년 ‘쇼’라는 명칭이 적합하지 않아 교감 체험에 중점을 둔 ‘흑돼지야 놀자’로 프로그램명을 바꿨다고 설명했다. 또 공연에 나가는 8~30개월령 돼지들은 평소 휴애리 안에서 미끄럼틀과 같은 놀이시설을 이용하며, 축협에서 구매한 별도의 돼지 전용 사료를 하루 3번 급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공연 때 먹는 먹이는 주식과는 차이가 있는 간식이라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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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복지연구소 어웨어 이형주 대표는 돼지는 원래 높은 곳에 올라가서 미끄럼틀을 타는 동물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 프로그램은 온전히 보는 사람의 재미만을 위한 것”이라며 “적어도 교감 체험이라고 하면 동물 생태나 자연스러운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시간을 정해 강제로 미끄럼을 타게 할 것이 아니라, 사육 환경에서 돼지들이 체온을 낮추기 위해 하는 행동이나 먹이 찾는 행동 등과 같이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애피가 ‘노예 동물의 섬 제주’ 영상을 보도한 지난 18일 휴애리는 해당 프로그램을 잠정 중단한다고 알려왔다. 휴애리 관계자는 “아프리카돼지열병 예방에 동참하기 위해 5월18일부터 ‘흑돼지야 놀자’ 공연을 중지하기로 했다. 중단된 기간 동안 해당 공연을 좀 더 안전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의견을 모아 안전한 공연이 될 수 있도록 개선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제주/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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