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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천운영의 명랑한 뒷맛]뱀딸기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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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익으면 딸기밭에 갔다. 노지 딸기는 단맛보다는 신맛이 강했다. 턱이 움찔하는 신맛이었다. 그래도 토독토독 씨 씹히는 재미가 있었다. 혀가 얼얼해지도록 따먹고 나면, 다라이로 하나 가득 담아와 딸기잼을 만들었다. 한나절 꼬박 솥에 붙어 서서 단김을 쐬었다. 솥에 남은 뜨끈한 딸기잼을 식빵으로 닦아 먹으면 별맛이었다. 딱 이맘때, 하우스 딸기가 없던 시절, 딸기의 제철은 봄인 것이 당연하던 시절, 나들이 삼아 가던 딸기밭, 옛 딸기의 맛.

경향신문

딸기는 그렇게 생겨먹었다. 실 것이 분명한데도 먹고 싶게 생겼다. 빨갛고 반질거리고 통통하고 갸름하고. 예쁘게 먹음직스럽다. 향기가 넘쳐나고 단물이 퍼질 것처럼 생겨먹었다. 산딸기는 더욱 그렇다. 도글도글 알알이 선홍색으로 뭉친 산딸기의 모양은 앙증맞게 자극적이다. 발을 동동 구르면서 먹고 싶게 만드는 모양. 아 이렇게 예쁜 걸 어떻게 먹어. 뭐 그런 느낌. 역시나 하우스 산딸기가 있기 전, 야산을 오가다 우연찮게 발견해 한두 개씩 맛보던, 이게 웬 횡재냐 신나면서 어디 더 없나 감질나게 만들던, 산딸기의 진짜 맛은 거기서부터 온다.

그리고 뱀딸기가 있었다. 뱀딸기는 산딸기보다 흔하게 만났다. 모양은 산딸기를 닮았다. 하지만 먹지 못하는 딸기, 혹은 먹으면 안되는 딸기였다. 뱀이 먹는 딸기라고도 했고, 넝쿨 속에 뱀이 숨어 있다고도 했고, 뱀이 지나다니는 길에 나는 게 뱀딸기라고도 했다. 그래서 뱀, 딸기인 거라고. 독버섯처럼 독이 있다고도 했고, 눈썹을 뽑고 먹으면 독이 안 오른다고도 했다. 누군가는 보는 것만으로도 독이 오르니 눈썹을 뽑아야 한다고도 했다. 다 어린애들의 소문이었지만, 어쨌거나 뱀딸기는 금지된 열매였다. 그래서 더 자극적이었다. 먹을 수는 없다지만, 먹고 싶게 만드는 마력의 뱀딸기.

그래서 맛보았다. 일단 눈썹 하나를 뽑아 버리고, 나무 막대기로 넝쿨을 휘휘 저어 뱀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고, 괜히 발소리를 크게 내서 허세를 부린 다음, 살금살금 다가가 냉큼 따서 후다닥 돌아왔다. 기어이 손을 대고야 만 뱀딸기. 나는 금단의 열매를 베어문 아담이다! 내게 지혜를 다오! 뱀이여 올 테면 오라! 그리고 먹었다. 실망이었다. 맛이 없었다. 시지도 달지도 쓰지도 않았다. 어중간하게 시고 쓰고 무르고 맹맹했다. 먹고 나서 알았다. 그냥 맛이 없어서 먹지 말라고 했던 거라고. 그런데 자꾸 먹으려 하니까 뱀타령을 한 거다. 뒤도 안 돌아보고 그곳을 떠났다.

누군가 그런 얘기를 했다. 제일 맛있는 과일은 제철 과일이 아니라 먹지 말라는 과일이고, 그보다는 먹지 말라는 걸 훔쳐 먹는 과일이라고. 훔쳐 먹는 맛이야 모든 음식에 치는 최강의 감미료일 터. 그래서 또 훔쳐 먹어봤다. 작정하고 훔친 건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오래전이었다. 문청 시절. 친구와 함께 일지암에 갔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여연 스님에게 차 한 잔 얻어 마시고 오자는 것. 초의 선사가 칩거했던 일지암은 다선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차를 아는 스님만을 주인으로 모신다고 했다. 당시 베스트셀러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읽고, 벼르던 일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한낱 소설가 지망생에게 차를 내줄지 미지수지만, 그렇다고 지레 포기할 필요도 없었다.

일지암은 참 멀었다. 첫차를 타고 출발했지만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해질녘이 다 되어서였다. 아무도 없었다. 스님은커녕 보살도 동자승도 뵈지 않았다.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밤을 새서라도 차 한 잔 꼭 얻어 마시고 가겠노라 결연히 앉아 기다렸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스님 방은 어찌 생겼나. 먼저 문을 연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몰라도, 문을 연 순간 우리의 모든 신경이 한 곳으로 향해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엉덩이는 마루에 걸쳐 놓은 채, 들어간 것도 아니고 아주 안 들어간 것도 아닌 상태로, 향냄새 그윽한 스님의 방 한구석, 찻상.

다기만 살짝 들여다볼 생각이었다. 스님이 마시는 찻잎을 구경만 할 생각이었다. 손가락으로 살짝 만져만 볼 생각이었다. 손에 닿은 찻잎 하나 씹어 그 맛을 어림만 해볼 생각이었다. 혀끝에 닿은 딱 한 톨의 찻잎. 손에 쥐고야 만 한줌의 찻잎.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두 사람 먹을 수 있을 만큼. 스님 물건 훔치면 지옥 간다는 말 들은 적 있어? 물건이 아니라 차잖아? 스님이 계셨으면 분명 차를 내주셨겠지? 아껴둔 차를 선물로 내주셨을지도 몰라. 차를 아는 스님이라잖아? 우리와 함께 차를 마시지 못한 걸 서운해하실 거야. 그럼 앞으로 근사한 소설가가 될 사람들인데.

달빛도 없는 어두운 산길. 우리는 그저 고개만 주억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윽고 불빛이 보이고 절 밑 여관방에 도착해 방문을 잠글 때까지. 야 이 도둑년들아, 누군가 쫓아올 것만 같았다. 산딸기나 됐으면 그 자리에서 먹어치워 증거를 없애면 되지만, 찻잎은 다음 공정이 꼭 필요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훔친 차를 마셨다. 물을 붓고 또 부어서, 아무 맛도 나지 않을 때까지, 붓고 또 부어서, 말없이 마셨다. 스님 방에서 훔친 녹차 맛. 그것이 내가 맛본 최고의 차 맛이었다, 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솔직히 별맛 없었다. 그냥저냥 녹차 맛이었다. 혀가 아니라 머릿속에 남는 맛이었다. 심장만 벌렁벌렁하는 뱀딸기 맛이었다.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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