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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고병권의 묵묵]용서를 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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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를 구하지 않는 자를 용서해야 하는가. 전두환 일당이 뉴스에 등장할 때마다 내게 떠올랐던 물음이다. ‘5·18 민중항쟁’에 대한 망언이 넘쳐나던 올해는 특히 그랬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전두환은 군사반란과 내란, 내란목적살인 등의 혐의로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뉘우친 적이 없다. 범죄에 대한 사법적 추궁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일련의 과정을 ‘근거 없는 술책’이라며 비난했다. 2년 전 펴낸 회고록에도 속죄는 없었다. 진실에 대한 개인적 고백인 회고록을 그는 속죄보다는 자기정당화에 활용했다. 오히려 고해성사하듯 헬기 사격의 진실을 증언했던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로 몰았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의 부인이 그를 가리켜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경향신문

속죄는 고사하고 피해자를 모욕하며 호의호식하는 학살자. 그러나 그는 법적으로는 용서받은 자이다. 대법원 판결 8개월 만에 대통령의 특별사면을 통해 내란, 살인 등의 무시무시한 죄를 모두 용서받았다. 사실 사면은 죄를 확정하기 이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당시 모든 대선후보들이 국민통합을 명분으로 그에 대한 사면을 약속했기 때문이다(이야말로 대선 승리를 위한 ‘근거 없는 술책’이었다).

죄를 확정하기도 전에 예정된 사면은 정의의 구현을 희화화했고, 진실규명 전에 천명된 국민화합은 역사 바로 세우기를 뒤틀어버렸다. 용서가 급하니 죄상을 낱낱이 밝힐 수 없었고, 화해가 급하니 처벌을 오래 끌 수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이상한 현실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용서는 끝났는데 용서할 수 없는 사실들이 이제야 나오기 시작하고, 역사를 세웠는데 거기 들어갔어야 할 벽돌들이 바깥에서 나뒹굴고 있다. 전두환은 집단발포 직전 광주에 있었고, 군대는 ‘무릎앉아쏴’의 편안한 자세에서 시민들을 향해 발포했으며, 헬기의 기총사격이 있었고, 야만적 성폭행이 자행되었으며, 심지어 아우슈비츠처럼 소각로를 만들어 시신들을 불태웠다는 증언과 증거들. 그런데도 용서를 받은 학살자는 “이거 왜 이래!” 하며 화를 버럭 낸다.

용서를 구하지 않는 자를 용서해야 하는가. 그런데 최근 나는 자크 데리다의 <용서하다>를 읽으며 내 물음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선 나는 은연중에 용서를 속죄와 교환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누군가 자기비판의 고통 속에서 속죄한다면 그 정당한 대가로서 용서를 지불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이런 식의 사고는 용서를 “계산의 논리에 휘둘리게” 한다. 법의 논리와도 다를 바가 없다. 범죄와 처벌의 호응관계를 뒤집어서 속죄와 용서의 호응관계를 만들어낸 것뿐이니까.

또한 나는 은연중에 용서를 ‘진정한 화해’에 이르는 징검다리로 생각하고 있었다. 진상규명 후 가해자가 속죄를 하고 피해자가 용서를 하면 고통이 치유되고 화해가 이루어질 것이라 본 것이다. 그러나 진상규명, 속죄, 용서, 치유는 직접 맞물려 있는 톱니바퀴들이 아니다. 진상을 규명한다고 속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속죄를 했다고 용서를 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용서를 했다고 해서 피해자의 상처가 아물 것이라 단정할 수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갈등을 견딜 수 없기에 진상규명 전부터 속죄를 다그치고 속죄가 이루어지기 전부터 피해자에게 용서하라는 말을 꺼내며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데도 역사의 종결을 선언해버린다.

끝으로 내 물음에는 정말 큰 문제가 있다. 나를 은연중에 ‘용서를 구해야 하는 자’로부터 빼낸다는 점이다. 심지어 은근슬쩍 용서의 권한을 가진 사람인 것처럼 행세한다. ‘우리’라는 이름 속에 들어가서 나는 무슨 자격으로 무엇에 대해 용서를 할 수 있을까. 내게는 이 역사적인 상처와 관련해서 용서를 구할 일이 없는가.

나 역시 함부로 용서를 말했던 사람들, 심지어 피해자에게 용서와 화해를 다그쳤던 사람들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 같지 않다. 교환의 시각으로 용서를 바라본 것은 법적 처분이 끝났으니 더 이상의 추궁은 불가능하다는 사람들의 생각에서 멀지 않고, 진정한 용서가 가능할 때 진정한 화해도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은 화해를 위해 이제는 용서를 하라는 사람들의 생각에서 멀지 않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 자’에서 자기 자신을 빼놓는 점에서는 아주 똑같다.

이는 전두환을 용서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용서란 물건을 교환하듯 혹은 빚을 갚듯 청산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설령 그것이 속죄일지라도). 또 용서와 화해는 별개이며, 누구도 화해를 이유로 용서를 꺼낼 수 없다는 것. 아마도 상처는 ‘용서한다’는 말 이후에도 아물지 않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는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는 무한한 상처 위에서 계속될 것”(데리다)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우리는 스스로 계속해서 용서를 구하는 방식으로만 그 상처에 다가갈 수 있고 그 상처 위에서 고백하고 다짐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런 고백과 다짐을 가능케 한 상처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 어떤 것으로도 덮을 수 없는 상처가 어떤 것으로도 덮을 수 없을 만큼 큰 선물이라는 것.

오월 광주 39년. 이 지면을 통해 나 역시 용서를 구한다. 미안합니다. 부끄럽습니다. 고백합니다. 다짐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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