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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검찰 힘빼기 핵심 '피신조서 제한', 檢 밖에서 더 반대하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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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신조서 제한하면… 檢 "혐의 입증 몇배 어려워"
법원 "법정서 다시 수사하는 셈… 판사 수 늘려야"
2005년 헌재, 합헌 결정 후 "보완 입법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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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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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에 회부된 검·경수사권 조정안에는 검사의 피의자신문조서(피신조서) 증거능력을 제한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검찰도 반대하고는 있지만, 오히려 법원에서 더 우려를 표시하는 조항이다. 이 조항이 그대로 통과될 경우 "법원에 ‘증거 폭탄’이 쏟아져 형사재판이 길어지게 된다"는 게 이유다. 검찰 조서를 재판에서 일일이 인정해야 하는 절차가 생기는 것은 물론 인정하지 않을 경우 재판부가 사건 전체 증거조사를 도맡아야 하는 일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검찰과 경찰은 피의자를 조사한 내용을 문답 형식의 문서로 남긴다. ‘꾸민다’는 표현을 쓰는 피의자 신문조서다. 같은 이름이지만 누가 작성했느냐에 따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피의자일 때 수사기관에서 한 진술을 형사재판 과정에서 부정하면 법원은 이를 증거로 쓸 수 없게 돼 있다. 그러나 검찰의 피신조서는 예외다. 강요에 의하거나 남이 대신한 것이 아닌 이상 검찰에서 한 진술은 재판에서 피고인이 번복해도 증거로 채택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형사소송법 제312조 1항에 규정된 이러한 증거능력 덕분에 검찰은 그동안 피의자로부터 자백을 얻어내 손쉽게 혐의를 입증해 왔다. 이 과정에서 강압수사가 이뤄지고, 피의자는 경찰에서 한 진술을 검찰에서 다시 되풀이하는 이중수사를 받기도 했다.

여야 4당이 지난달 22일 작성한 패스트트랙 합의문에는 "검사의 피신조서 증거능력에 대해 제한하는 것으로 변경한다"면서 "다만 법원 등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보완책을 마련한다"고 명시돼 있다.

검찰의 피신조서 증거능력을 제한해야 한다는 논의가 처음은 아니다. 2005년 헌법재판소는 광주지법에서 사기죄로 재판 받던 피고인이 형사소송법 312조에 대해 위헌 소지가 있다며 제청한 위헌법률심판에서 재판관 5대 4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지만, 찬반 양측 모두 현 제도는 공백이 있다며 관련 입법을 촉구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으로 기소된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연구관 측도 이달 초 이 법 조항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했다고 밝혔다. 유 전 연구관의 변호인은 "수십년간 당연하다는 듯 검사의 피신조서를 증거로 인정했지만, 세계 어느 선진국도 검사의 조서로 재판하는 경우는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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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기자


그러나 검찰 피신조서 증거능력 제한에 대한 부담은 고스란히 법원에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게 법원 측의 우려다. 우선 재판부는 사건 관계자들을 법정에 불러 일일이 질문과 답변을 통해 그들의 주장과 항변을 들어봐야 한다. 형사 재판이 지연, 혹은 장기화 될 수밖에 없고. 그러면 재판과정에서 피고인 구속기간이 끝나거나 여러 변수가 생겨 혼란을 부를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난 3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 핵심 인물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자신의 첫 재판에서 전·현직 법관과 법원 직원 등 170여명의 검찰 진술조서를 증거로 채택하는데 반대했다. 검찰은 이들 진술 내용을 증거로 쓰려면 일일이 증인으로 불러 신문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현행 법률에선 참고인 등 관련자의 검찰 조서는 경찰 조서처럼 재판과정에서 동의 절차를 거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피고인의 진술 조서마저 보태지면 사실상 재판이 수사처럼 진행돼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한 부장판사는 "피신조서 증거능력을 제한하면 ‘폭탄’이 떨어져 재판이 안 된다"면서 "대부분의 재판에서 임종헌 재판같은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고 했다. 재경법원의 한 판사는 "재판부로서는 증인을 모두 불러 진술을 듣는 것이 현실적으로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현재 판사 수(數)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판사정원법상 우리나라 판사의 정원은 3214명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한국의 판·검사 수는 선진국의 3분의 1 수준"이라며 "보통 판사들은 1년에 100건씩 재판하는데 법원에서 일일이 증거능력을 인정해야 하면 맡은 사건의 절반도 못끝낼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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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일 검찰총장이 16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열린 검·경수사권 조정 법안에 관한 기자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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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입장에서 피신조서 증거능력 제한은 이번 수사권 조정안에서 '검찰 힘빼기'의 핵심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예상보다 검찰 입장은 유보적이다. 문무일 검찰총장은 지난 16일 대검찰청에서 진행한 기자간담회에서 피신조서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사회가 급속히 바뀌어 수평적·보편적 민주주의 시대에 와 있다"면서 "피의자 신문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문 총장은 그동안 검찰의 피의자 신문 방식과 그 조서에만 증거능력을 부여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취지에 공감했다. 그러나 이날은 "피신조서의 증거능력에 관해서는 효율성도 중요하지만 적법성과 신중성도 중요하다"며 "제도를 한꺼번에 바꿀 때 오는 공백에 우려도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저도 몇 가지 안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법조계에 따르면, 조서를 작성할 때 변호인이 참여해야만 증거능력을 인정하는 등의 조항을 마련하는 방안, 피의자가 피신조서를 자유롭게 수정하기 어려운 실무적 환경 등을 절차적으로 보완하는 방안 등이 제시된 바 있다.

하지만 검찰 내부에선 "혐의 입증을 위한 노력이 몇 배 더 필요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거의 모든 조사 내용을 영상녹화 해야 하고,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범죄들은 기소 자체가 어려워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지역 한 부장판사는 "검찰 입장에선 타기관과 달리 특별 대접받는 대표적인 법조항이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을리 없을 것"이라며 "하지만 조서에 의한 재판에서 증거와 증인에 의한 재판으로 ‘무게중심’이 옮겨지는 것 자체는 공판중심주의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했다.

[홍다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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