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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꼭꼭 숨어라, 판결 내용 보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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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판결문 공개 인색한 법원

조선일보

일러스트= 안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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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대법원의 한진중공업 통상임금 관련 소송 판결엔 이목이 쏠렸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낸 이 소송에는 경영난을 호소하는 기업 상황이 통상임금 책정의 변수가 될 수 있는지 등 쟁점이 담겨 있었다. 2016년 구조조정을 진행한 이 회사는 지난해 1조2836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대법원은 1·2심 판결을 뒤집고 '정기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해 수당을 더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매출이 안정적이라 수당을 지급해도 경영상 중대한 어려움이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비판도 옹호도 있었지만 뒷말은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한진중공업 매출액은 매년 큰 등락 없이 5조~6조원"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회사의 매출액은 2008년 이후 4조원을 넘은 적이 없다. 최근엔 1조원대로 떨어졌다. 부담할 추가 법정수당인 5억원이 매출 5조원의 0.1%(실제론 0.01%)로 기재되기도 했다. 기업 경영난이 쟁점이 된 사건에서 찜찜한 실수가 나온 것이다.

이번 판결은 이해관계자가 많았고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문제 제기를 한 것도 기업이 아니었다. 여러 사람이 판결문을 읽은 덕에 오류가 지적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건은 많지 않다.

판결문 공개에 인색한 대법원

재판에서 발생하는 오류는 얼마나 될까. 집계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당사자 이름, 주소, 형량이나 죄명을 잘못 기재하거나 원고와 피고를 바꿔 선고하는 등의 경우 판결문을 고치는 경정(更正)이 이뤄지는데 이를 통해 엿볼 수는 있다.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실이 대법원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16년 6월까지 민사 2만9972건, 형사 1164명에 대한 판결 경정이 이뤄졌다. 연간 6000건가량이다. 통계보다 오류는 더 많을 수 있다. 10년 차 로펌 변호사는 "하급심에서 오류가 발견되는 경우 항소하면 되기 때문에 따로 경정 신청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같은 오류는 사법 불신을 깊게 만든다.

전문가들은 판결문이 많은 사람에게 공개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판결문을 완전한 방식으로 공개하는 것은 정확하고 공정한 판단의 전제 조건이란 주장이다. 공개를 제한할 이유도 없다. 헌법 109조는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한다'고 말한다. 더욱이 판결문 공개는 누가 어떤 사람에게 어떤 내용의 판결을 했는지 드러낸다. 전관예우 등 병폐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대법원은 판결문을 꽤 까다로운 방법으로 공개한다. 대상도 확정된 판결문에 한해 제한적 방법으로 열람을 시키는 것이다. 개인 정보 보호가 가장 큰 이유다. 기업의 영업 비밀, 성폭력 등 범죄 피해 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점 등을 꼽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최근 검찰 수사로 대법원 관계자들이 퇴직하면서 판결문 초고, 재판 자료, 연구보고서 등을 법원 바깥으로 유출한 사례가 드러났다. 개인 정보 보호를 외치는 말과 실제 행동은 정반대인 사례였다. 판사들이 정말로 걱정하는 것은 자신들의 권위 저하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더 많다. 대법원이 지난해 판사 1117명을 상대로 미확정 형사사건 판결문 공개 의견을 물었더니 찬성이 20.6%에 불과했다.

조선일보

대법원 ‘판결 정보 특별 열람실’에선 판결문 열람이 가능하지만 컴퓨터가 4대뿐이다. 2주일 전부터 진행하는 예약도 시작 5분 만에 끝난다. 이용이 쉽지 않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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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만 국민에 컴퓨터 4대

현재 판결문을 열람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서울 서초동 대법원 건물에 있는 '판결 정보 특별 열람실'을 이용하는 것이다. 원하는 키워드를 넣어 판결문을 찾을 수 있고 열람할 수 있다. 문제는 열람실의 컴퓨터가 단 4대뿐이라는 것. 2주일 전부터 인터넷으로 진행되는 예약은 하늘의 별 따기다. 5000만 국민이 컴퓨터 4대에 목을 매야 한다. 판결문을 검색한 후 사건번호 외 어떤 메모도 불가능하다. 열람실에 메모지가 놓여 있는데 직원이 여기에 무엇을 적었는지 일일이 검사한다.

판결문 인터넷 열람 제도를 이용할 수도 있다. 방문 없이 인터넷을 통한 검색과 열람이 가능하지만 대상이 확정 판결문에 한해서다. 항소 등을 통해 재판이 진행되는 경우엔 하급심 판결문을 확인할 수 없다는 얘기다. 더욱이 형사는 2013년, 민사는 2015년 이후 판결문만 제공된다. 한 건에 1000원씩 내고 볼 수 있는데 검색어를 입력하면 간략한 요지만 보여 원하는 판결문을 찾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 원하는 판례를 찾기 위해 수십 건을 결제했다는 사람이 많다.

'대법원 종합법률정보 사이트'에 접속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여기 실린 판결문은 전체 판결의 1%도 안 된다. 대법원이 '선례적 가치가 있는 판결'의 판결문을 올려두는 곳이다. 자의적으로 선별된 판결문만 올라온다는 얘기다. 각 법원 사이트에서 판결문 사본 열람을 신청할 수도 있지만 법원과 사건번호 등을 알아야 하고 2주 정도 걸리는 단점이 있다.

판결문을 이처럼 까다롭게 열람시키는 나라는 드물다. 미국은 확정되지 않은 하급심 판결문이라도 선고한 지 24시간 이내에 온라인 사이트에 게시한다. 미국이 불문법(不文法) 국가라는 반론도 있지만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심지어 중국도 선고일로부터 짧게는 24시간, 길게는 2~3개월 내 대부분 판결문을 공개한다. 중국의 재판문서를 공개하는 인터넷 사이트 '중국재판문서'에는 16일 기준으로 6791만4606건의 재판문서가 등재돼 있다.

판결문 입수에도 지연, 학연

상황이 이렇다 보니 법조계에선 판결문을 얻는 것이 능력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변호사들 사이에서 판결문 얻는 것이 '판사와 친하고 대인관계도 넓다'는 것을 방증하는 일이란 것이다. 기이한 광경이다.

전관들은 전 직장 동료들로부터 판결문을 수월하게 구한다. 판사와 친분이 있는 변호사들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도 지연, 학연 등이 동원된다. 아예 사설 사이트에서 한 달에 일정 금액을 내고 판결문을 얻는 변호사도 많다.

대법원이 이야기하는 개인 보호 논리도 일리는 있다. 확정되지 않은 하급심 판결문이 제한 없이 공개되면 개인 정보가 유출될 수 있고 범죄의 2차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공개 전에 민감한 개인정보 등은 감출 수 있다. 서정욱 법무법인 민주 변호사는 "기업의 영업 기밀이나 개인 신상 노출 염려는 예외 적용을 둬 공개하지 않는 등 현재도 제한 장치가 있다"고 했다.

반대로 법원이 지나치게 정보를 가린다는 주장도 있다. 대법원 예규는 당사자가 법인이나 단체일 경우 그 명칭을 제외한 대표자 성명이나 법인 주소 등을 삭제하도록 규정한다. 그러나 우리 법원은 법인명까지 가리는 경우가 많다. 땅콩 회항 사건의 대한항공을 V항공이라고 표시하는 식이다. 기업에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태섭 의원은 "개인정보 보호 논리가 판결문 공개를 막는다면 공개재판도 잘못이라는 말이 가능하다"며 "기술적으로 해결 가능한 개인정보 보호 문제로 국민의 사법 접근권이 달린 판결문 공개를 제한해선 안 된다"고 했다. 현재 국회에는 미확정 판결문 공개를 가능케 하는 내용의 민사소송법·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계류돼 있다.

[김아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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