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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비타500은 3년째 냉장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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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현진의 순간속으로]

조선일보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만든 영화 ‘생일’의 한 장면이다. 왼쪽은 영화 속 배우 설경구, 오른쪽은 전도연. ‘유민 아빠’로 알려진 김영오씨는 앞에서 하염없이 울던 나에게 “이제 그만 울어요”라며 비타500을 쥐여줬다. 그 비타500은 여전히 내 냉장고에 있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오늘도 다짐한다. /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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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4월은 잊을 수 없이 쓰라린 날이 되고 말았다. 꽃이 피고 바람 따라 꽃잎이 날리는 아름다운 계절. 왜 이때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흘려야만 할까. 그토록 많은 아이가 차가운 바닷속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그 후 5년간, 봄이 올 때 꽃은 피어나지만 그 아름다움만큼 진한 슬픔이 느껴지곤 했다.

창작과비평에서 출간된 '금요일엔 돌아오렴'은 말 그대로 수학여행이 끝나는 금요일에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에게 몇 번이고 돌아오라고 외는 진혼곡이다. 이 진혼곡은 떠나간 넋을 위로하면서 떠나간 사람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자녀를 잃어 무너져 내린 가슴에 어떤 위로의 말을 들려준다 한들 그것이 어찌 찢긴 가슴에 스며들겠는가.

일반인 희생자도 많지만 단원고는 한 학년이 깡그리 없어지다시피 한 아픔을 겪었다. 학생 부모들의 심장은 아직도 갈기갈기 찢긴 채일 것이다. 멀쩡하게 잘 키운 아들을 사고로 하루아침에 잃은 고 박완서 작가도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뜨는 '참척'에 대하여 그토록 오랫동안 절절히 쓰지 않았던가. 김애란, 김행숙, 박민규 등이 다수 참여한 문학동네의 책 '눈먼 자들의 국가' 역시 너무나도 안타깝게 우리 곁에서 사라져 버린 영혼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세월호가 침몰한 지 5년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노란 리본을 소지품에 달고 다닌다. 우리 모두가 4월 16일 배가 가라앉던 시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생생히 기억한다. 당시 유족들이 모인 광화문에는 대구지하철 사고 유가족들과 민주화 운동으로 아들, 딸을 잃은 부모님들이 '울지 마라, 우리가 그 마음 안다'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나에게 세월호는 '비타500'이다. 웬 뜬금없는 비타민 음료 이야기냐 하면, 2016년 세월호가 침몰 2주년을 맞았을 당시 우리에게 '유민 아빠'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김영오씨를 인터뷰했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는 '너희는 즐거운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울라'는 구절이 있다. 나는 그 구절을 매우 좋아하지만, 이렇게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자 대책 없이 흐르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 자식 잃은 슬픔 앞에서 어떤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내가 당시 진행하던 팟캐스트를 위해 김영오씨와 인터뷰를 녹음하면서, 나는 광화문의 공기가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깊은 슬픔들 사이에서 어쩔 줄 몰랐다. 결국 질문지에 나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김영오씨는 "유민이가 꿈에라도 한번 나와 주면 좋겠는데, 꿈에도 나와 주지 않는다"며 탄식했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줄줄 새고 있는 내 얼굴을 보면서 그는 결국 눈시울이 벌게졌다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는 잠깐 녹음을 진행하지 못하고 함께 펑펑 울었다. 엔지니어는 어쩔 수 없이 마이크를 잠시 껐다. 스태프들과 봉사자들, 유가족들이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그렇게 서로 휴지를 건네주며 코를 풀고 눈물을 닦고 하다가 김영오씨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인터뷰를 하면서 운 적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긴 단식 투쟁을 이어가면서도, 그 많은 비난을 받으면서도 늘 강인해 보이기만 했던 그의 눈은 흠뻑 젖어 있었다. 세월호 유가족 중에서도 얼굴이 알려진 축에 속하는 그에게, 모든 행적이 보상금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은 지나가다가 백원짜리나 오백원짜리 동전을 힘껏 던지며 이렇게 소리친다고 했다. "돈 좋아하지?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특히 광화문이라는 입지 특성상 어르신이 많이 오간다. 그중에서 김영오씨를 알아보고 "어서 이 짓 집어치우고 썩 없어져라"며 호통을 치는 사람들도 드물지 않다고 했다. 이제 김영오씨는 그런 노인들에게 일일이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했다. "네, 제가 빨리 해결하고 이 자리 접겠습니다. 조금만 더 하겠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잘해서 빨리 집어치우겠습니다. 조금만 더 싸우고 빨리 집에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금방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울면서도 결국 인터뷰를 마쳤다. 김영오씨도 한참이나 눈물을 찍어냈다. 야속하게도 꿈에 한번 찾아와주지도 않는다는 유민이에 대한 그리움. 광장은 김영오씨의 그리움뿐 아니라 저마다 가슴에 묻고 만 아이에 대한 그리움으로 꽉 찼다. 그 속에서 나는 울음을 그치지 못한 채 한참을 얼굴을 찡그리고 못나게 훌쩍였다. 광장을 꽉 채운 슬픔이 너무나 절절해서, 이 슬픔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정치 논리로 재단하는 목소리들이 아파서, 그렇게 울고 있는데 김영오씨가 나에게 화장지를 건네며 나를 달랬다. 그러고는 울어서 꽉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만 울어요. 울지 말아요."

그 말을 듣자 내 눈에서는 눈물이 더 나오기 시작했다. 그만 울라니, 울지 말라니. 이 말은 우리가 그들에게 해주어야 할 말이 아닌가. 눈물을 닦아 주며 더 울지 말라고 위로하며 해주어야 할 말이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하기 위해 왔다는 내가, 유가족들에게 울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다니. 뒤바뀌어도 한참 뒤바뀐 것이 아닌가. 이 아이러니에 나는 더욱 눈물이 났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을 잃은 사람에게 도리어 울지 말라는 위로를 받은 건 너무나 이상했고 이상해서 더 슬펐다. 김영오씨는 내 팔을 토닥거리며 누군가 자신에게 준 '비타500'을 건넸다. 그리고 다시 울지 말라며 다독였다. 나는 차마 그 '비타500'을 마시지 못하고 집으로 가지고 와 냉장고에 넣었다. 3년 내내 그 '비타500'은 냉장고에 그대로 있다. 그리고 나는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유민이와 그 친구들에 대한 생각을 피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는 유민이 아버지의 눈물을 떠올린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가장 보람된 일은 누군가를 위로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글쟁이가 되라고,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비타500'이 나에게 말한다.

조선일보

그간 부족한 글을 너그럽게 봐 주신 독자 여러분께 이번을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리며, 다들 부디 강녕하시기를 빈다.

연재를 마칩니다

'김현진의 순간속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김현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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