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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책과 삶]‘동료’가 죽었다, 그 노동자는 ‘나’일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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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조선소 노동자

마창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 기획

코난북스 | 288쪽 | 1만5000원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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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노동절 ‘거제조선소 크레인 사고’ 현장의 생생한 목격담

안전수칙 어긴 ‘인재’…삼성중공업 대표이사는 입건조차 못 시켜

부상자들은 저마다 육체적 고통은 물론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려

비정규직뿐 아니라 ‘산재 트라우마’에 불친절한 한국 시스템 고발


2017년 5월1일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800t 골리앗 크레인과 32t 지브형 타워 크레인(지브형 크레인)이 작업 중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쓰러진 지브형 크레인이 노동자들이 몰려있던 프로세스 모듈 3층 메인데크를 덮쳤다. 6명이 목숨을 잃었고, 25명이 다쳤다. 이날은 휴일인 노동절이었지만 1623명이 출근했다. 이 중 1464명(90.2%)이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죽거나 다친 사람 역시 모두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였다.

이날 사고는 공사기일에 쫓겨 안전수칙을 위반하고 무리하게 일을 밀어붙이다 발생한 ‘인재’였다. 조선업 중대산업재해 국민참여조사위원회가 2017년 11월부터 6개월간 조사를 거쳐 2018년 9월5일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사고의 주된 원인은 원청 사업주(삼성중공업)가 지브형 크레인을 설치할 때 위험성 평가를 온전히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지브형 크레인이 골리앗 크레인과 충돌할 위험을 평가해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또 원청이 좁은 공간에 많은 사내도급 노동자를 동시에 투입하도록 해 피해가 컸다고도 했다.

이 책 <나, 조선소 노동자>는 그날의 사고를 목격한 노동자 9명의 구술집이다. ‘사망 6명, 부상 25명’이라는 간단명료한 숫자로는 나타나지 않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다. 이들은 정신적 외상을 입었고 여전히 후유증을 겪고 있다.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일하라’고 가볍게 말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김석진씨(가명)는 무서움을 안 타서 공포영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 놀이기구나 번지점프를 좋아했지만 다 과거의 일이다. 이사한 집 앞 공사장에 크레인이 보이자 암막커튼으로 창을 가렸다. 창문 가까이 가지도 못해 부엌에서 잔다. 죽으려고 스위스에서 안락사할 때 쓰인다는 약을 인터넷에서 구입했는데 다행히 ‘사기’였다.

김명진씨(가명)는 머리 위에 뭐가 있으면 불안해 못 견딘다. 약을 먹어도 좀처럼 낫지 않는다. 아이와 놀이동산도 가지 못한다. 조르는 아이에게는 ‘아빠가 이제 나이 들어가 겁이 많아 못 가겠다’고 했다.

김종배씨는 운전할 때 자꾸 사고 모습이 환영으로 보여 여러번 접촉사고를 냈다. 어느 날은 11년간 불러온 딸 이름이 기억 나지 않았다. 회사 이름, 사람 이름, 시간도 자주 잊어버렸다. 사고 이후 술은 끊었지만 담배는 두배로 늘었다.

박철희씨는 현장에서 함께 일하던 동생을 잃었다. 사고의 부상자이면서 유족이 됐다. 유족대표단으로 삼성중공업 측과 합의금 협상을 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못 볼 꼴’을 보고 겪었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형수 덕에 일찍 정신건강센터 상담을 했고 산재 인정도 받았다. 그럼에도 아직 불면증으로 술에 의존해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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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나, 조선소 노동자>가 암시하듯이 책에는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연상시키는 일화가 자주 등장한다. 영화에서 병든 노동자 다니엘 블레이크는 복지혜택 기준을 맞추기 위해 전전하다 결국 죽음에 이른다. 사고 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한국의 노동자들도 ‘아프다면서 일은 어떻게 하냐’는 질문을 받고 ‘고통을 호소해도 그 고통을 입증하라고 사무적으로 대하는 공무원’을 만난다. 의사 소견서에 따라 휴업급여 등의 지급여부가 결정되는데 의사가 몇가지 질문만으로 ‘취업 가능’이라고 판정해 급여가 끊기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의 시스템은 병든 노동자들에게 결코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

마창거제 지역에서 활동하는 산재추방운동연합(이하 산추련)은 사고 이후에도 계속 상처받고 있는 이들을 치유할 목적으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노동자들의 심리적 고통을 함께 나누고 치유를 지원하고자 만들어진 심리·상담활동가 네트워크 ‘심심통통’이 여기 참여했다. 세월호 유가족 등의 이야기를 기록해온 인권기록 활동가들도 합류했다. 노동자들은 전국 곳곳에서 일자리를 찾아 거제로 왔듯, 사고 후 다시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활동가들은 거제뿐 아니라 대구, 울산, 인천, 충남 당진 등으로 찾아가 노동자들을 만났다.

활동가들은 사고 당시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들의 인생 전체를 듣고 기록하려 애썼다. 이들이 어떤 인생을 거쳐 그날 그 사고현장에 있었고, 그 이후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당사자의 목소리로 직접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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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1일 경남 거제시 삼성중공업에서 발생한 크레인 충돌 사고 현장 모습. 노동절인 이날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 6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다쳤다. 경남소방본부 제공


구술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마음은 한결같다. 김종배씨는 말한다. “시간이 더 지나면 모르겠는데 사고를 당해보니까 내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안 들을 것 같아요. 그래도 말을 해야 할 거 같아요 (…) 사람이 살다 보면 사고도 나고 실수도 할 수 있죠. 그래도 좀 덜 나게, 큰 사고 날 것을 작은 사고로 줄일 수 있게 자꾸 뭐라도 누구라도 해야 할 것 같아요. 계속 관심을 갖고 해야 할 것 같아요.”

그간 언론 인터뷰 등에 적극적으로 응해온 박철희씨는 그 이유를 설명했다. “사고 난 이후 제가 가장 감동했던 때가 세월호 부모님들께서 자식 잃은 아픔 속에서도 계속 말씀하시는 걸 봤을 때예요. 그런 분들을 보면서 저도 용기를 가져요. 언젠가는 우리나라에서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 같은 게 통과될 날이 오겠죠. 그러니 기록을 남겨야죠. 저는 살아 있으니까요. 그 사고를 겪었고, 진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제가 가진 거라고는 그것뿐이니까요. 불쌍한 제 동생의 인생이 이렇게 기록으로라도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안타깝게도 이번에도 빠진 목소리가 있다.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책에 담지 못했다. 책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는 조선소 전체 노동자의 1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고 당일 출근했던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사고 후 어떤 안내와 지원도 없었다. 트라우마 증상을 묻는 설문조사도 한국어로만 배포됐다.

활동가들은 이번 기록에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포함시키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이은주 마창거제 산추련 상임활동가는 책 말미에 실린 ‘기획자의 말: 안전이라는 정당한 권리를 위하여’에서 “안타깝게도 스무살부터 삼성중공업에서 일해왔던 어느 미얀마 노동자는 혹여 나중에라도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하여 많은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고, 책에 실을 수가 없었다”고 밝혔다.

그날의 사고 이후 한국 사회는 얼마나 변했을까. 아니 그 사고를 교훈으로 삼긴 한 것일까. 2018년 12월4일 열린 형사재판 결심공판에서 검사는 안전보건 총괄책임자였던 삼성중공업 조선소장에게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징역 2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벌금 500만원을 구형했다. 삼성중공업 법인에는 벌금 3000만원을 구형했다. 삼성중공업 대표이사는 사고발생에 대한 예측 가능성이나 지배 가능성이 있었다고 보기 힘들다는 이유로 입건조차 되지 않았다.

김명진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 작업들을 무리하게 진행해서 생긴 일이잖아요. 대표가 있을 거고, 전무가 있을 거고, 담당자가 있을 거잖아요. 게네들은 이 일을 과연 신경이나 쓸까요. 그때 당시 징계 좀 받고 욕 한번 얻어먹었을 거고, 얘네들은 일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하나의 실수로만 생각하겠죠 (…) 이 사람은 나중에 돈 주고 누구한테 또 시키겠죠. 자긴 상관없으니깐.” 이 말이 예언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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