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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5 (토)

안전위협 ‘정신건강 응급 매뉴얼’ 은 왜 휴짓조각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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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부·경찰청·소방청 등

자신과 타인 해칠 위험 큰 경우

응급대응 매뉴얼 만들었지만

진주 참사 피의자엔 이행 안돼

경찰 응급입원에 나설 수 있으나

‘민원' 책임 부담 등 개입 소극적

정신병원서도 응급입원 반기지 않아

정신건강복지센터는 인력·예산 부족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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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아파트 참사 피의자 안아무개(42)씨는 사건 전에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고, 오물을 쏟아붓는 등 이웃과 마찰도 심했다. 경찰, 주민센터 등이 안씨의 정확한 병명은 몰라도 정신건강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

앞서 보건복지부는 경찰청·소방청·국립정신건강센터와 함께 망상·환각 등으로 인해 자신과 다른 사람의 안전을 위협할 경우 일선 경찰관, 정신건강복지센터 정신건강전문요원, 119구급대 등이 해야 하는 조처를 규정한 ‘정신과적 응급상황에서의 현장대응 안내’를 내놓았다. 자·타해 위험이 있는 사람을 발견한 지역 주민이나 공공기관 종사자, 경찰관 및 119구급대원 등은 정신건강위기상담전화를 통해 상황을 알리고 상담을 요청할 수 있다. 이런 매뉴얼이 있고 여러번 징후도 있었지만 안씨에 대한 응급조처는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경찰, 정신보건사회복지사, 의사, 환자 당사자에게 응급대응 체계의 문제점을 물었다.

① 응급입원 꺼리는 구조

경찰관직무집행법에 따르면, 자해 징후가 있거나 반복적 폭행·욕설 같은 공격 성향이 지속되는 등 긴박하고 위험한 경우 ‘응급입원’을 지원할 수 있다. 응급입원이란 자·타해 위험이 심각한 사람을 경찰이 데려가 의사 진단을 받은 뒤 3일간 입원시키는 제도다. 하지만 정신보건사회복지사나 환자 등은 경찰이 이런 위기상황에 개입하길 꺼린다고 지적했다. 정부 안내서에는 정신과적 응급위기상황 분류척도(CTRS)에 따라 대상자가 ‘극도의 위기’ 상황인 경우 응급입원 조처가 필요하다고 돼 있다. 경찰이 이러한 지표 사용이 어려울 경우 광역·기초자치단체가 설치한 정신건강복지센터에 협조를 구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러한 협조체계는 유명무실하다. 형사과에 근무하는 한 경찰은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른 사람을 병원으로 데려가 응급입원을 시켰다. 그런데 환자의 친척과 종교기관이 응급입원 조처에 민원을 제기해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며 “타인에게 직접적 위협을 가하지 않았을 땐 강제입원을 시킬 근거가 부족하고, 응급입원으로 인한 민원이 발생할 경우엔 경찰 개인이 그 부담을 안고 있다”고 설명했다. 개입 근거가 있지만, 현장 상황이 매뉴얼대로 돌아가지 않고 소신껏 대처하면 되레 불이익이 돌아오니 소극적이 된다는 것이다. 협업해야 할 정신건강복지센터는 인력과 예산·권한이 부족함에도 정신건강 증진을 위한 인식개선은 물론 자살예방 사업까지 맡은 업무가 광범위하다. 이러한 환경 탓에 도움이 절실한 중증 정신장애인 지원이나 응급상황 개입 여력이 부족한 상태이다.

2011년부터 정신보건 시범사업이 진행된 광주광역시는 그나마 정신건강복지센터와 경찰·주민센터 간 협업이 이루어지는 편이다. 익명을 요청한 광주지역 한 정신보건사회복지사는 각 기관에서 응급입원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기준이 달라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얼마 전 폭력을 휘두른 환자가 있어 경찰에 응급입원을 요청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며 “주민센터·사회복지협의회 등과 간담회를 연 뒤 다시 지구대를 찾아 응급입원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그는 “환자를 의사 앞에 데리고 갈 수 있는 건 경찰인데, 이들의 공무집행을 제도로 뒷받침해주면 좋겠다. 경찰에도 정신건강 전문인력이 있거나 정신과적 응급상황에 대한 대처법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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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병원서도 반기지 않는 환자

환자의 치료를 맡는 건 결국 의료진이다. 국내 정신병원 90% 이상은 민간 소유로, 다수의 병원에선 응급입원 환자를 반기지 않는다. 검사 등 들이는 품에 견줘 경제적 보상이 적고 병원비를 받지 못할 우려가 커서다. 응급입원할 병상이 모자라 다른 지역으로 가야 할 때도 경찰·119구급대가 난색을 표할 때가 있다. 이정하 ‘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 대표는 “본인·가족이 아닌 공공기관이 개입해 이뤄지는 응급·행정입원(자·타해 위험시 지방자치단체장이 진행하는 입원)의 경우 누가 비용 부담을 할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위기 상황에 놓인 정신장애인에 대해 국가가 책임지는 구조가 안착하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내가 사는 동네에도 정신장애인들이 많은데 간혹 증상이 악화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관리사무소로 민원이 들어가고, 그 다음엔 주민센터나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찾아온다. 그런데 진주에선 이러한 개입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라며 “(정신적 문제로 인해) 위기에 처하거나 민원이 발생할 때 어디로 연락해야 할지부터 정비돼야 한다. 또 이러한 연락을 받았을 때 대응 체계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국내 응급의료시스템엔 정신과적 판단 체계가 없다”며 “미국의 일부 주에는 정신응급의료 중심 기관이 있어서 경찰·구급대는 그곳으로 환자를 이송하고 신속하게 위험평가·상담·안정이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정신장애인 탈시설화 정책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경우 정신병원을 줄이는 대신 의료서비스를 포괄하는 지역 정신보건센터를 대폭 늘렸다.

③ 응급입원, 그 이후엔?

응급입원이나 행정입원으로 위기를 넘긴다 하더라도, 지역사회에 치료·재활·복지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 않으면 증상 악화로 인한 위험이 반복될 수 있다. 앞서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 자·타해 및 치료 중단 우려가 있거나, 입원 전 범죄 경력이 있는 환자는 본인 동의 없이도 의료기록·범죄전력을 정신건강복지센터 등에 통보하는 법안들이 발의된 바 있다. 그러나 현장 전문가들은 이런 정책엔 실효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관리 위주의 치안적 관점은 ‘사회적 낙인·편견’을 강화해 정신질환 치료를 지연하는 악순환을 낳는다는 것이다. 광주 지역 정신보건사회복지사는 “주민센터에서 복지 서비스를 하다 문제가 있어 보이는 사람을 발견하면 정신건강복지센터에 연락을 한다. 주민센터 직원과 함께 그 집을 방문해 안면을 트고 대화를 나누다 상담을 권유하기도 한다. 결국 사람 관계를 통해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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