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7 (수)

"한국서 '춘사월'에 스키라니…해외원정 온 듯 황홀"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때아닌 25cm 폭설·한파에 ‘춘사월 스키’
폐장→재오픈→폐장→재재오픈
스키어들 몰려…雪質 ‘최고’
"수십 년 근무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

"4월 중순에 한국에서 스키를 타다니, 여기 한국 맞나요? 해외 원정 온 것처럼 황홀하네요."

지난 12일 오전 강원도 평창군 용평리조트 케이블카 입구. 군데군데 눈이 수북이 쌓여 있는 이곳에 ‘춘사월(春四月) 스키’를 즐기려는 스키어들이 삼삼오오 모여 스키 부츠를 신고 있었다. 지난달 24일 폐장한 스키장과 눈썰매장이 이상 저온 현상과 함께 ‘4월 폭설’까지 내려 ‘깜짝 재개장’을 한 덕이다. 용평스키장은 11일부터 13일까지 스키장 일부 슬로프를 개방했다.

조선일보

지난 12일 ‘깜짝 재개장’한 강원도 평창 용평리조트 레인보우 슬로프에서 한 손님이 스노보드를 타고 있다. /평창=최지희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새벽 5시에 서울에서 장비를 싣고 왔다는 조재희(36)씨는 차 트렁크에서 스노보드를 꺼내며 "벚꽃이 만개할 때 스키장에 와본 건 처음"이라며 "유럽 고지대 스키장도 문을 닫는 4월에 한국에서 스키를 즐기는 건 ‘세상에 이런 일이’격 아니냐"고 했다.

◇"20년 경력에도 4월 재개장은 처음"
지난 3월 말 용평리조트 스키장은 폐장했다. 이후 리조트 측은 슬로프를 골프장으로 바꾸기 위한 작업을 준비했다. 봄이 오고 온도가 오르면서 쌓여있던 눈이 녹을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평 지역에 이상 저온 현상이 나타났다. 아침에도 영상을 유지하던 예년과 달리, 영하 2~3도의 추운 날씨가 지속됐다.

눈이 녹지 않자, 결국 리조트 측은 골프장 조성 작업을 중단했다. 그리고 주말인 지난 6~7일 스키장 문을 다시 열었다. 2018년 스키시즌이 막을 내릴 줄 알았지만, 한파에 문을 다시 열게 된 것. 이틀간 스키 마니아 400여 명이 몰렸다.

조선일보

지난 12일 강원도 평창 용평리조트를 찾은 스키어들이 리프트를 타고 있다. /최지희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춘사월 스키는 여기서 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난 9~10일 강원도 지역에는 때 아닌 폭설이 내렸다. 쌓인 눈의 깊이가 무려 25cm. 웬만한 성인 무릎까지 눈이 찼다. 강원 영동지방 기상 관측이 시작된 1985년 이래 4월 최대 적설량이다. 여기에 최저 영하 2도~최고 7도 등 3월보다 오히려 쌀쌀한 날씨가 사흘 이상 지속됐다. 말그대로 설상가상(雪上加霜)이었다. 인공눈을 뿌리지 않아도 해발 1450m의 슬로프는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용평스키장 측은 기대하지 않은 폭설에 지난 11일 2차 재개장을 한 뒤 오는 13일까지 스키장을 운영하기로 했다. 재개장을 위해 폐장 후 정리했던 장비를 재정비하고 인력 충원에 나섰다. 패트롤(patrol·안전요원) 10여 명과 리프트 운영 기술자·탑승보조원 8명, 눈을 정리하는 장비인 스노우캣 3대를 급히 투입했다.

눈밭에서 20년을 보낸 경력자에게도 ‘4월의 스키장’은 낯설었다. 전우하 용평리조트 스포츠본부장은 "스키장에서 수십 년 일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4월이면 슬로프 눈이 녹아 ‘눈밭에서 땅이 나온다’고 표현하는데, 이땐 인공눈으로도 메울 수 없어 폐장밖엔 답이 없다. 하지만 올해는 그야말로 스키 타기 딱 좋은 상태가 됐다"고 했다.

조선일보

지난 12일 강원도 평창 용평리조트를 찾은 손님이 레인보우 슬로프에서 스노보드를 타고 있다. /최지희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전 본부장은 "눈이 녹아 스키타기 불편한 ‘슬러시(slush·잘게 부순 얼음)’ 상태와는 정반대로 오전에는 보송한 눈 위에서 쾌적하게 스키를 탈 수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 한겨울보다 雪質 좋은 이유? "기후 변화 영향"
지난 11~12일 이틀간 약 350명이 스키장을 찾았다. 전국 곳곳에서 모인 스키어들은 ‘믿기지 않는다’ ‘황홀하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서울에서 홀로 스키장을 찾은 원정식(29)씨는 "스노보더 커뮤니티인 ‘헝그리보더’에서 재개장 소식을 접하고 아침 7시에 서울에서 차를 끌고 달려왔다"며 "1월 중순 눈 상태와 맞먹을 정도로 설질(雪質)이 훌륭하다"고 말했다.

KTX를 타고 스키장을 찾은 이들도 있다. 가족과 서울에서 KTX를 타고 2시간 30분 걸려 스키장에 온 전선재(42)씨는 "지금 시기엔 일본 홋카이도에나 가야 탈 수 있는 스키를 국내에서 타니 감사할 따름"이라며 "일곱 살 아들에게 스키를 가르쳐 주려고 왔는데 눈 상태를 보니 여느 외국이 부럽지 않다"고 말했다. 연차를 내고 왔다는 김빈(35)씨는 "기차여행도 할 겸 새벽에 나와 이곳에 왔는데 가슴이 뻥 뚫린다"며 "4~5월에도 기후가 허락한다면 탄력적으로 슬로프 개장을 하면 좋겠다"고 했다.

한겨울보다 좋다는 슬로프 상태를 가능케 한 이상 저온 현상은 ‘기후 변화의 영향’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반기성 케이웨더 기상예보센터장은 "봄철 이상 한파는 온난화에 따른 기후 변화로 나타난 현상"이라며 "지난 겨울 눈이 적게 오고 기온까지 상대적으로 높았던 것도 온난화로 더 빈번하게 나타나는 엘니뇨가 주 요인이었다. 일상을 벗어나는 기후가 앞으로 더 자주 발생할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지난 12일 강원도 평창 용평리조트를 찾은 스키어가 리프트를 타러가고 있다. /최지희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재개장 외려 손해지만 스키 인구 늘리려 감행
‘깜짝 재개장’ 결심을 하기까지 리조트 측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과거에도 스키장 폐장 후 눈이 슬로프에 수북이 쌓인 적은 있었지만, 재개장한 전례는 없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을뿐더러 안전 문제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법적으로는 슬로프 1개당 안전요원 2명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려면 너댓배 이상의 인원이 필요하다. 인건비와 전기비 등 운영비를 따지면 재개장은 손해 보는 장사인 셈이다.

깜짝 개장은 수익보다 ‘스키 전도’를 고려한 고육책이다. 최근 국내 스키 인구는 가파르게 줄어들고 있다. 2006년 용평리조트 기준 70만명에 육박했던 스키 인구는 10년 새 반 토막이 났다. 지난해 11월부터 올 3월까지 스키장을 찾은 이들은 총 30만명이 채 안 된다. 지난 1월 단 24일 동안 180만명이 몰린 화천 산천어 축제와 대조적이다.

전 본부장은 "수익성을 고려하면 재개장은 해선 안 될 선택"이라면서도 "가뜩이나 줄고 있는 스키 인구를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다면 손해를 보더라도 여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 감행한 것"이라고 말했다. 용평리조트는 눈썰매장은 5월 어린이날까지 개장하기로 결정했다.





[최지희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