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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강진구의 고전으로 보는 노동이야기](16) ‘직장 괴롭힘’에 좌절한 베르테르의 비극이 계속돼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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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5년)에는 이야기 중심에서 벗어나 있지만 ‘직장내 괴롭힘’이라는 또 하나의 베르테르의 슬픔이 등장한다. 그림 그리기와 호메로스 읽기를 좋아하던 베르테르에게 궁정이나 공사관에서 안정된 직업을 갖는 것은 예속을 의미했다. 그는 스스로의 정열이나 욕구가 아닌 돈과 명예를 위해 악착같이 일하는 사람을 ‘천치’라고 생각했다. 베르테르가 꿈꾸던 노동은 자유로운 삶을 표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20대의 괴테가 꿈꾸는 노동이기도 했다. 괴테는 23세 때인 1772년 황실 고문관을 지낸 아버지의 권유로 고등법원에서 견습생활을 했지만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대신 그곳에서 약혼자가 있는 샤로테 부프(애칭은 로테)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고 그때 이루지 못한 사랑의 체험을 바탕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집필하게 된다.

경향신문

고 김홍영 검사 어머니가 2016년 7월 기자회견장에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통해 부장검사의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아들의 원혼을 달래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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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베르테르를 통해 귀족들의 격식 차린 삶보다 서민들의 육체노동을 통한 소박한 삶에 더 강한 유대감을 표시했다. “보리수 밑에서 커피를 마시는 모임이 있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핑계를 대고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때 마침 머슴처럼 보이는 한 사람이 오더니 쟁기의 고장난 곳을 고치는 등 열심히 손질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에게 말을 걸고 신상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베르테르가 운명의 여인 로테를 만난 발하임에서의 일상생활 역시 서민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아침에 해가 뜨자마자 발하임으로 가서 그곳 주막집의 채소밭에서 완두콩을 따고 자리 잡고 앉아서 콩껍질의 심줄을 떼어내면서 호메로스의 작품을 읽는다. 내 기분은 정말로 흐뭇하다. 인간의 솔직하고 허식없는 기쁨을 느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유럽 자본주의 변방이었던 19세기 말 독일의 작은 도시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써내려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전편에서 노동은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창조해가는 인간의 주체적 삶과 연결돼 있다. 하지만 베르테르가 이미 약혼자가 있는 로테와의 사랑을 뒤로하고 실연의 상처를 잊기 위해 어머니와 친구들의 간청에 못 이겨 공사관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노동은 노예선 속으로 빠져든다.

베르테르는 공사관에서 일을 시작한 다음날 친구 빌헬름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사와의 관계가 순탄치 않음을 예고한다. “어제 우리는 이곳에 도착했다. 그분(공사)이 그렇게 불친절하지만 않더라도 모든 일은 순조롭게 잘될 텐데. 하지만 용기를 내겠다. 경쾌한 기분으로 살아가면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있겠지.”



경향신문

‘젊은 베르테르의 슬

픔’의 작가 괴테.


괴테, 귀족들 격식 차린 삶보다

육체노동 서민에 유대감 표시

베르테르 통해 주체적 삶 표현


상사 간섭·억압 받는 베르테르

김홍영 검사·서지윤 간호사 등

한국 노동현실과 다르지 않아


가해자보다 피해자에 책임 전가

괴롭힘 적절한 대처는 극소수

존엄성 침해하는 ‘폭력’ 멈춰야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던 베르테르지만, 공사만 제외하면 공사관에서의 생활은 처음 얼마 동안 그럭저럭 참을 만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사관 심부름으로 만나 서로 마음을 터놓게 된 C백작과 동료 직원 B양은 베르테르에겐 산소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공사와의 갈등은 커지고 베르테르의 인내심은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공사는 끔찍한 인물이다. 그는 일찍이 겪어본 적이 없을 만큼 고집이 센 데다 잔소리가 이만저만 심한 것이 아니다. 나는 일을 선뜻 해치우기를 좋아하고 일단 끝난 것은 내버려두고 들추어보지 않는 성격이다. 그런데 공사는 내게 문서를 도로 내밀면서 곧잘 이렇게 말한다. ‘이것도 틀리지는 않았지만 다시 꼼꼼히 검토해 보게’라고 할 때마다 나는 미칠 지경이 된다. 그리고라는 접속사 하나도 빼놓아서는 안되고 가끔 내가 즐겨 쓰는 문장에 도치법이라도 튀어 나오면 그는 질색을 한다.”

직장 상사의 자질구레한 간섭과 억압에 머리를 감싸쥐는 베르테르의 고민은 지금의 노동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7년 노동자 150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최근 1년 사이 직장생활에서 존엄성이 침해되거나 적대적, 위협적, 모욕적인 업무환경을 한번이라도 느낀 적이 있다는 응답자는 73.3%였다.

하지만 직장내 괴롭힘에 적절한 대처를 하고 있는 피해자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10명 중 6명 이상(60.3%)은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베르테르도 C백작에게 자신이 처한 곤경을 호소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C백작은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는 물론이고 남도 괴롭히고 일을 망치는 법’이라고 했지만 참고 지내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런 일은 산을 넘어가야 하는 나그네처럼 꼭 참고 체념할 수밖에 없어요. 물론 산이 없으면 가는 길은 훨씬 편하고 거리도 한결 가까워지겠지요. 그러나 산은 이제 엄연히 가로놓여 있으니, 넘어가지 않을 수 없어요.”

하지만 참고 견디라는 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공사는 C백작과 베르테르가 가깝게 지낸다는 사실을 눈치챈 후 기회 있을 때마다 베르테르 앞에서 C백작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C백작과 가깝게 지내지 말라는 경고의 표시였다. 하지만 자신을 속일 수 없었던 베르테르는 참고 벼르다 “그분은 인격으로 보나 학식으로 보나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라고 대꾸했고 사태는 더욱 악화됐다. 공사는 비꼬는 말투로 집요하게 괴롭히다가 궁정에 인사조치를 건의했고 결국 장관으로부터 견책 지시가 내려왔다. 직장 괴롭힘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것이다. 베르테르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제 공사와 나 사이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듯하다. 그 인간을 나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국가인권위 조사결과에서도 피해자가 직장내 괴롭힘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가 거꾸로 불이익을 당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31.1%가 업무상 부당한 대우나 불이익을 당했고, 단지 문제를 제기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거나(29.5%) 악의적 소문이 퍼지는 경험(26.9%)을 했다. 베르테르도 직장 상사의 언어폭력에 말대꾸를 했다가 징계를 받은 데 이어 급기야는 직장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베르테르가 따돌림을 당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은 C백작의 초대를 받고 만찬장에 갔을 때였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떼를 지어 몰려들어왔다. 낯이 익은 몇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상스럽게도 모두들 아주 입이 무거웠다. 여자들이 서로 귀에다 대고 소곤거렸으며 그것이 남자들에게도 전해지고 드디어 S부인은 백작에게 이야기를 했다.”

C백작은 난처한 표정으로 다가와 ‘우리 모임 관습은 정말 이상스러워서…’라며 말끝을 흐렸고, 베르테르는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남은 말상대는 동료 직원 B양이었지만 입장이 난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홀 안에 들어섰을 때부터 선생님 때문에 전 얼마나 괴로웠는지 몰라요. 저는 미리부터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었지요. 선생님에게 그 이야기를 모조리 털어놓을까 하고 혀끝까지 말이 나올 뻔했어요.” 가까운 동료 직원까지 자신으로 인해 힘들어 하고 있음을 알게 된 베르테르는 더 이상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사표를 제출한 후 고향 친구들에게 어머니를 잘 부탁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나는 궁정에 사직원을 냈는데 아마도 수리될 것이다. 어머니는 슬퍼하실 테지. 추밀고문관이나 공사를 목표로 삼아 아들이 씩씩하게 내디딘 눈부신 인생행로가 느닷없이 중단되어 마치 말을 몰고 마구간으로 되돌아온 격이 되어 버렸으니.”

하지만 베르테르가 사표로 직장생활을 마무리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직장 따돌림은 심각한 우울증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태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심각한 사회적 폭력이다. 2016년 5월 33세의 서울남부지검 김홍영 검사는 한 통의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택에서 발견된 유서에 “쉬고 싶다. 처리되지 않는 사건들을 보면 죽고 싶다’고 돼 있었다. 이 때문에 처음엔 과도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부각됐다. 하지만 고인이 생전 친구들에게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는 업무량보다는 직속상관인 부장검사의 가혹행위에 대한 하소연이 대부분이었다. “보고할 때 결재판으로 수시로 찌르고 폭언을 했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지 자고 일어났는데 귀에서 피가 나 이불에 묻었다.”

지난 1월 서울의료원의 서지윤 간호사가 간호행정부서로 이동된 지 12일 만에 정신적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고인은 유족들에게 평소 ‘언니 나 오늘 밥 한 끼, 물 한 모금도 못 먹었다’며 살인적인 업무량을 하소연했다고 한다. 고인이 남긴 카톡 문자에는 “가서 커피 타다가 혼남” “신발소리가 좀 시끄러웠는데 팀장들이 그걸로 앞담화 뒷담화” 등 직장 상급자들의 눈초리 때문에 숨조차 쉬기 힘든 억압적인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겼다. 고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문자는 “병원 사람들은 조문도 오지 말라”였다.

직장내 괴롭힘으로 인해 누군가 극단적 선택을 하거나 퇴사를 하는 경우 대부분 피해자에게 그 책임을 돌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남들도 다 참고 견디는데 피해자의 민감하고 예민한 성격이 문제라는 식이다. 베르테르의 경우도 장관은 견책과 함께 한 통의 편지에서 그의 지나치게 예민한 감수성을 훈계했다. ‘태움’이라는 말을 우리 사회에 남기고 지난해 2월 세상을 떠난 서울아산병원의 고 박선욱 간호사는 최근 산재 판정을 받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판정서에서 또다시 예민한 성격을 거론했다. 공단은 “피재해자는 매우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로, 업무를 더욱 잘하려고 노력하던 중 신입 간호사로서 중환자실에서 업무상 부담이 컸고 과중한 업무를 수행해 피로가 누적되고 우울감이 증가해 자살로 이어진 것”이라고 판정 이유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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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단의 판정서는 고인의 이모가 지난해 8월 산재 신청 기자회견에서 한 “우리 사회는 내성적인 사람은 일하면 안되는 사회인가요”라는 질문에 간접적인 답변이 됐다. 공단이 예민한 성격을 거론한 것은 살인적 업무량과 억압적인 직장문화만으로는 산재 인정이 힘들다고 봤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부족한 잠과 거르게 되는 끼니” “선생님의 눈초리” 등 고인이 문자에 남긴 근무환경은 여전히 ‘둔감한 감수성’을 가진 동료들에게는 감내해야 하는 숙명이 됐다.

베르테르는 공사관에서의 생활이 절망으로 치닫게 되자 다시 로테에게 편지를 쓴다. “이 허탈의 물결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의 꼴을 당신이 본다면. 내 마음은 메마를 대로 메마르고 가슴속이 벅차도록 넘치는 순간이라곤 찾아볼 수 없으며 행복한 시간은 한시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약 베르테르가 일을 사랑할 수 있었다면 그리스어와 고전에 능통하고 아이들 돌보기를 좋아했던 한 청년은 실연의 상처를 딛고 훌륭한 공사로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감독자의 눈초리’ 때문에 더 이상 베르테르를 잃어서는 안된다.

강진구 노동전문기자 kangj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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