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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편집국에서]뒤쪽이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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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이 다 정면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너그럽고 솔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내게 왔다가 돌아서서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것이 겉모습에 불과했었음을 얼마나 깨달았던가. 돌아선 그의 등이 그의 인색함, 이중성, 비열함을 역력히 말해주고 있었으니! (…) 뒤쪽이 진실이다! ….”

경향신문

오래 지니고 있는 책 <뒷모습>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2002년 출간되었으니 어느 새 17년 묵은 책,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진집이다. 이제는 고인이 된 저명한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와 사진작가 에두아르 부바가 공동 작업으로 펴냈다. 국내에는 불문학자 김화영이 옮겨 현대문학에서 출간했다.

에두아르 부바는 일상생활 속에서 만날 수 있는 남녀노소 50여명을 카메라 렌즈에 담았다. 그런데 사진 속 사람들은 모두가 등을 보이고 있다. 뒷모습이 핵심이다. 곰 인형을 등에 업은 소녀, 키스하는 남녀, 소를 앞세우고 쟁기를 메고 가는 농부, 지팡이를 짚고 가는 등이 굽은 할머니, 엎드려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 홀로 또는 여럿이 바다를 바라보는 이들, 어깨동무를 하고 걸어가는 친구로 보이는 두 사람…. 부바의 사진작품마다 투르니에는 시적인 문장을 곁들였다. 짧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사진과 시적인 글이 짝을 이루다 보니 보는 즐거움과 더불어 읽는 즐거움까지 준다. 그래서 문득 생각날 때마다 편하게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투르니에는 <뒷모습>에서 “뒤쪽이 진실”이라고 강조한다. 앞쪽은 얼굴로 온갖 표정을 지을 수 있고, 손짓은 물론 발짓과 어깻짓으로도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다. 가릴 수도 있다. 하지만 뒤쪽은 앞쪽에 비해 거의 없다고 할 만하다. 그저 넓적한 등과 어깨, 엉덩이가 있을 뿐이다. 꾸며내거나 거짓말을 할 방법이 없으니 솔직하고 정직하고 또 진실할 수 있다. 투르니에가 “뒤쪽이 진실이다”라고 천명한 것을 보이지 않는 이면, 숨겨진 진실을 보자는 것으로 이해한다.

최근 화제가 된 사건들이 있다. 공통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의구심을 가지는 사건들이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성범죄 의혹, 장자연씨의 죽음, 이제는 ‘사건’에서 ‘게이트’로 변하는 ‘버닝썬’이 대표적이다. 의구심은 앞에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 뒤쪽에 드러나지 않은 진실이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실제 김 전 차관과 장자연씨 사건은 발생한 지 10년이 지났다. 하지만 그동안 잠잠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끊임없이 여러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검찰과 경찰의 수사결과 발표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얼굴이 아니라 등에, 앞쪽이 아니라 뒤쪽에 있는 것 같은 진실을 주목한 것이다. 결국 대통령까지 나서 이 사건들을 콕 집어 철저한 진상규명을 지시했다. 법무부 장관과 행정안전부 장관은 득달같이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철저한 수사를 다짐했다. 마치 검찰과 경찰이 지금까지는 제대로 수사를 하지 않았다는 실토로 읽힌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명확한 규명, 가려진 진실이 있다면 그것을 앞으로 드러내야 한다. 이들 사건은 우리 사회의 권력층 인사들, 검찰과 경찰까지 얽혀 있어 더욱 그렇다.

이 사건들과 관련된 뉴스를 접하면서 <뒷모습>을 다시 펼쳤다. “뒤쪽이 진실이다”라는 투르니에의 말이 새삼 다가온다. 가수이자 방송인인 정준영과 ‘제2의 정준영’들이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에서 주고받은 문자들을 보면서는 더 절감했다. 팬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는 정준영은 성관계 동영상을 몰래 촬영해 거리낌없이 단톡방에 공유했다. 공유가 아니라 자랑했다. 다른 인기 연예인들은 그 영상을 보며 히히댔다. 스스로들 ‘쓰레기짓’임을, 범죄임을, 부도덕함을 알면서도 말이다. 공범들이다. 그들의 모습은 방송 카메라 앞이나 무대 위와는 전혀 달랐다. 그들의 진정한 실체는 정면이 아니라 뒤쪽의 단톡방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 역시 투르니에의 말이 맞다. 이제 그들은 각자 저지른 죄만큼 벌을 받고, 부도덕성을 질타받는 게 마땅하다. 물론 그들의 소속사인 연예기획사, ‘소나기만 피하자’는 식으로 범죄를 저지른 연예인들을 다시 카메라 앞에 세웠던 방송사들도 책임을 피하기는 어렵다.

오고간 그 단톡방 문자들을 보면서 그들만의 행태일까라는 자문도 한다. 여성의 성이나 신체를 상품화하는 우리 사회의 뒤쪽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단톡방 문자가 공개된 이후 거리낌없이 벌어지는 2차 가해를 본다. 왜곡된 성의식과 성문화, 관음증까지 내면화되는 한국 사회의 솔직한 뒷모습이다. 이쯤에서 자신의 단톡방을 한번쯤 살펴보자. 어쩌면 나의 진정한 실체도 앞이 아니라 뒤쪽에 있는지 성찰할 때다.

도재기 문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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