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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언제나 열린, 시 애호가들의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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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상하이 시 전문 서점 ‘열었다 닫았다 여는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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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히도 가난하던 시절이 있었다. 세 들어 살던 베이징 집 근처 농민공 식당에서 5위안(당시 환율로 약 600원)짜리 볶음밥 하나를 사서 점심에 절반을 먹고 나머지 절반은 저녁에 먹었다. 가장 자주 갔던 곳은 집 근처 대형 마트. 무료 시식 코너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곳 3층인가에 작은 서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베스트셀러 몇 권에 자기계발서나 돈 버는 방법에 관한 책이 대부분이던 조악하기 짝이 없는 작은 서점이었지만, 가난한 내가 그나마 무료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행복한 공간이었다.

“나는 그 까만 눈으로 광명을 찾는다네”

비바람 불던 어느 날, 톈진에 사는 중국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눈물 콧물 질질 짜며 쏟아놓은 녀석의 신세 한탄 요지인즉, (나와도 자주 만났던) 여자친구에게 실연을 당했다고. 먼저 졸업해서 학교 교사로 취직한 여자친구가 같은 학교 동료를 사랑하게 되었다며 헤어지자고 통보했다는 것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 동료 교사가 아이 있는 유부남이었지만 여자친구는 그래도 상관없다며 결연하게 자기에게 이별을 통보했다고 한다.

“누나, 나 괴로워서 죽을 거 같아. 지금 당장 기차 타고 베이징 가서 누나랑 술을 퍼마셔야겠어. 여기서는 미칠 거 같아. 그래도 되지? 나 간다, 두세 시간만 기다려….”

전화를 끊고, 대충 집 청소를 한 뒤 자주 가던 집 근처 대형 마트로 향했다. 실연당한 그 녀석과 밤새도록 ‘퍼마실’ 술을 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마트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지갑 속에 50위안(약 6천원) 조금 넘는 돈밖에 없다는 ‘슬픈’ 사실을. 맥주 몇 병과 싸구려 백주 한 병을 사면 나는 내일부터 5위안짜리 볶음밥조차 사 먹을 돈이 없게 된다는, 슬프고도 슬픈 현실이 얄팍한 지갑 속에 들어 있었다.

나는 고르던 맥주병을 놓고 3층으로 갔다. 문 닫을 시간이 다 된 때라 3층은 유난히 사람이 적었다. 그곳에서 잠시 ‘선택’을 미루고 이 책 저 책 만지작거리며 머릿속으로는 ‘술과 볶음밥’을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히 눈에 띈 시 한 구절.

“까만 밤은 나에게 까만색 눈을 주었지만, 나는 그 눈으로 광명을 찾는다네”(黑夜給我了黑色的眼睛,我却用 尋找光明)

구청(顧城)이라는 중국 시인의 시집에서 읽은 시구다. 그날 밤, 나는 마트가 문 닫을 때까지 계속 그 자리에 서서 구청의 시집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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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오싱루 80번지, 간판 없는 서점

그곳에는 간판이 없었다. 온 거리를 몇 번이나 돌아도 서점 간판을 찾을 수 없었다. 아는 건 오직 주소뿐. 사오싱루 80번지. 결국 전화를 걸었다. 그는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라며 대략의 위치를 설명해주면서 문 앞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물어물어 겨우 80번지를 찾아 문 앞에서 다시 그에게 전화하니, 바로 눈앞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요, 여기!”

마당에 두 남자가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서점 주인 황셩과 그의 친구 저스틴 홍이 ‘멀리서 온’ 낯선 손님을 반갑게 맞으며 “여기가 바로 당신이 찾던 그 서점”이라며 문을 열어 안내했다.

“사오싱루에 있는 독립서점 대부분 간판이 없어요. 예전에는 문 앞에 서점 간판을 내걸었는데 어느 날 거리관리위원회에서 ‘미관을 해친다’며 철거하라고 했어요. 정말 말도 안 되는 빌어먹을 핑계죠. 간판 하나가 무슨 거리 미관을 해친다고. 그냥 우리 같은 작은 독립서점 간판이 사람들 눈에 띄는 게 싫은 거죠. 저기 상하이 출판국이나 상하이 문예출판사 건물 앞에는 대문짝만한 간판을 달아도 뭐라 하지 않으면서. 돈 없고 ‘빽’ 없는 나 같은 작은 서점 주인이 어떻게 정부에 항의할 수 있겠어요? 그것도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 사상’으로 새롭게 포장된 나라에서 말이죠. 하하하! 그래도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다 찾아와요. 외국인인 당신도 이렇게 찾아왔잖아요. 당신은 베이징에서 사는 게 좋나요? 사람들은 상하이가 중국의 경제·금융 중심이고, 상하이 사람들은 돈 버는 일에만 관심 있는 속물이라고 욕하지만 난 베이징이 더 숨 막혀요. 그렇게 답답한 곳에서 어떻게 살지요? 거기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죠? 그래서 더 숨 막히고 답답해요! 차라리 돈밖에 모르는 속물들이 모인 상하이가 더 나아요. 적어도 위선적이지는 않거든요.”

어딘지 모르게 시인 구청의 쌍거풀 진 ‘까만 눈’을 닮은 서점 주인 황셩이 연신 줄담배를 피우며 ‘간판 없는 서점’에 얽힌 울화통 터지는 사연을 연기처럼 줄줄이 뱉어냈다.

손님보다는 가난한 시인의 공간

사오싱루는 전체 거리가 500m가 채 되지 않는 곳이다. 이 작은 거리에 담긴 역사와 사연은 500년 세월만큼이나 길고 풍부하다. 특히 근대 이후 사오싱루의 역사는 상하이의 작은 역사나 마찬가지다. 중국 창장강(장강·양쯔강) 유역의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상하이가 근대 이후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며 급속도로 서구화되고 현대화된 상업 중심 도시로 변했듯이, 사오싱루 역시 식민지 조계지와 중화민국 시절을 거치며 상하이에서 가장 ‘문화적인’ 거리로 탈바꿈했다.

두 모습의 상하이가 있다. 오동나무들이 아름드리 우거진 옛 프랑스 조계지 거리를 중심으로 한 푸시 지역의 오래된 골목들이 이어진 올드 상하이와, 동방명주와 와이탄으로 상징되는 마천루와 푸둥 지역의 최첨단 글로벌 금융센터가 몰려 있는 현대적인 상하이다. 눈먼 관광객들은 대부분 동방명주 꼭대기에 올라 와이탄과 황푸강을 낀 상하이 전경을 둘러보고 와이탄과 신세계 주변에서 먹고 마시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그들이 절대 모르는 상하이의 진면목은 오래된 거리, 오동나무들이 우거진 옛 조계지 거리에 담겼다. 상하이의 대부분 역사는 그곳에 있다. 그중에서도 사오싱루는 가장 시적이고 서정적인 거리다. 크고 작은 출판사와 서점이 빼곡하게 들어찼고, 우리가 한때 가장 사랑했던 홍콩 배우 장국영의 추억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황셩의 서점은 사오싱루 80번지에 있다. 2015년 12월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황셩은 그곳에 ‘열었다 닫았다 여는 시집’(開閉開 詩集)이라는 시 전문 서점을 열었다. 10여 평 공간에 시중에선 구하기 힘든 오래된 시집과 절판된 시집이 사방 벽 가득 쌓여 있다. 물론 철학과 문학 서적도 있다. 서점 이름은, 이스라엘 시인 예후다 아미하이의 시집 제목에서 따왔다. 황셩의 서점은 얼핏 보면 늘 닫혀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시 낭독회를 열고, 함께 영화도 보고 밤새도록 같이 시를 쓰기도 한다. 물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도 된다. 그의 서점은 가난한 시인의 시 창작 공간 같은 분위기가 강하다. 손님도 책을 사러 오는 이들이기보다는 대부분 시를 사랑하는 황셩의 친구들이다. 그들은 모여서 밤새 술잔을 앞에 두고 시와 철학, 중국이라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대해 ‘이바구’를 떨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서점 구석 소파에 널브러져 잠이 들거나 각자 집으로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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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의 낭만 고양이들

황셩과 그의 친구 저스틴 홍과 3시간 남짓 오만 가지 화제로 수다를 떨다가 술을 마시러 가자고 했다.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오동나무 사이로 걸린 사오싱루의 홍등에도 하나둘 불이 켜질 시간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황셩이 일어나 앞장서더니 단골 식당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사오싱루에서 10여 분 정도 거리에 있는 식당은 적당하게 허름했다. 그곳에서 익숙한 요리 몇 가지를 시킨 황셩은 “잠시 어디 좀 다녀오겠다”고 사라지더니 20여 분 지나 소주 ‘참이슬’ 한 병을 사들고 나타났다. 한국 드라마를 보니 한국 사람들이 소주를 좋아하는 것 같다며.

밤이 익으면 술자리도 깊어지는 법. 마시고 먹고 또 마시며 웃고 떠들다보니 어느새 식당 안에는 그가 불러모은 괴짜 친구들이 몇 명 더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역시 사오싱루에서 철학 전문 서점을 하는 이고, 또 한 명은 만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펑크록 가수 같은 모습의 화가. 나중에 떠돌이 여행 사진작가 친구도 ‘소문을 듣고’ 달려왔다.

시간이 꽤 지나, 한국식으로 “2차 가자”고 외치며 식당을 나서려던 순간 나는 그만 황셩의 지갑을 보고 말았다. 기분 좋게 취해서 “계산은 내가 한다”며 일어나 계산대로 갔던 그의 지갑 안에는 100위안(약 1만7천원)짜리 한 장과 10위안(약 1700원)짜리 지폐 두세 장이 달랑 들어 있었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지난날 내 지갑 속 ‘가난의 액수’와 비슷했다. 지갑을 탈탈 털어도 밥값이 모자랐지만 그 돈마저 다 내버리면 그는 내일 먹을 ‘볶음밥’조차 사 먹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의 손을 얼른 치웠다. “내가 오늘 당신을 보자고 했으니까 이건 내가 사야 하는 밥이야. 다음번 상하이에서 또 만나면 그때는 당신이 사야 해!”

2차는 그의 서점으로 갔다. 탁자를 밀고 둘러앉아 밤새 맥주를 마셨고, 술에 취한 철학 서점 주인장이 보들레르의 시를 낭독했다. 듣다 지친 화가 친구가 기타를 꺼내 존 레넌의 노래를 메들리로 불러대더니 급기야 다들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췄다. 그 모습을 사오싱루의 떠돌이 고양이였다가, 황셩이 데리고 와 각각 ‘레닌’과 ‘보들레르’로 이름 지은 두 마리의 고양이가 ‘까만 눈’을 치켜뜨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여러분은 생각하는 법을 다시 배우게 될 거야. 말과 언어의 맛을 배우게 될 거야.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말과 언어는 세상을 바꿔놓을 수 있다. 시는 아름다워서 쓰는 것이 아냐.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에 시를 읽고 쓰는 것이라고.”

그날 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했던 키팅 선생이 사오싱루에 나타난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시를 낭독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그들은 떠나가는 키팅 선생을 향해 “캡틴, 오 마이 캡틴”을 외치며 ‘죽은 시인의 사회’를 애달파하는 남겨진 키팅의 제자들이었다.

술 대신 볶음밥

비바람 몰아치던 오래전 그날 밤, 나는 실연당한 친구와 함께 마실 ‘술’ 대신 다음날 먹을 ‘볶음밥’을 선택했다. 기차역에서 또다시 버림받은 불쌍한 그 녀석도 10여 년이 흐른 뒤에는 렉서스를 몰고 고급 주택을 샀다. 그사이 이혼과 재혼을 반복하며 ‘사랑 따윈 난 모른다’고 했지만, 몇 년 전 서울에 놀러와 명동 거리에서 막걸리를 함께 마시던 녀석이 ‘까만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누나, 그거 알아? 내가 그날 밤 베이징역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비바람은 몰아치고 누나는 연락이 안 되고. 실연당한 사랑만큼이나 세상에 믿을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았지. 누나 미워!”

상하이(중국)=글·사진 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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