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3 (금)

[정민의 世說新語] [511] 구구소한 (九九消寒)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일보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강위(姜瑋·1820~1884)가 벗들과 저녁 모임을 가졌다. 밖에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탁자 위 벼루는 꽁꽁 얼었다. 12명의 벗들이 차례로 도착하여 흰옷 위에 쌓인 눈을 털며 앉았다. 강위는 이날 함께 지은 시를 묶어 ‘구구소한첩(九九消寒帖)’이라 하였다.

강위가 지은 긴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뜬 인생 어디에다 몸을 부칠까? 세계란 허공 중의 한 떨기 꽃과 같네. 흘러가는 세월을 뉘 능히 잡나. 해와 달 두 탄환이 쟁반 위를 굴러간다.(浮生安所寄, 世界一華空中現. 流年誰能駐, 日月雙丸盤上轉.)" 환화(幻花)와 같은 세계 속에서 뜬 인생이 살아간다. 그나마 잠깐 만에 쏜살같이 지나가 버린다.

구구소한(九九消寒)이란 표현이 낯설어 찾아보니 명나라 유동(劉侗)이 지은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에 나온다. "동짓날에 매화 한 가지에 흰 꽃송이 81개를 그려두고, 날마다 한 송이씩 색칠한다. 색칠이 끝나 81송이가 피어나면 봄이 이미 깊었다. 이것을 구구소한도라고 한다." 윤곽선만 그린 9×9, 즉 81송이의 매화 그림을 붙여놓고 하루에 한 송이씩 붉은 꽃을 피워낸다. 마침내 화면 가득 홍매(紅梅)가 난만하게 피어나면 추위는 자취 없이 사라지고(消寒) 봄은 어느새 우리 곁에 와 있다. 강위 등은 눈보라가 몰아치던 동지 밤, 벗들과 시를 짓고 술잔을 나누며 아직도 먼 봄소식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추사 김정희가 벗에게 보낸 편지다. "객관에 홀로 떨어져 지내니 그리운 마음이 복받치는 것은 어쩔 수가 없겠지요. 그대로 하여금 남산 잠두봉 아래 제일가는 집에 있으면서 다리 하나 부러진 솥에 등걸불을 피워놓고 구구소한의 모임을 갖게 한다면 또 어떤 경계이리까?(第客舘孤逈, 情思棖觸, 理或然. 使左右在蠶頭之下第一家, 折脚鐺邊, 榾椊火前, 作九九銷寒, 又是何境?)" 해묵은 솥은 다리 하나가 부러져 조금 삐걱대야 제맛이다. 거기에 불을 피워 옹기종기 모여 술잔이라도 나누면 좋을 텐데, 타지에서 홀로 지내려니 쓸쓸하고 외롭겠다는 위로를 이렇게 건넸다.

봄을 맞는 데는 매일 한 송이씩 81일간 채색하는 정성이 든다. 여든한 번의 추위를 건너야 진짜 봄과 만날 수 있다.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