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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임의진의 시골편지]실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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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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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산 절집엔 고목 매화들이 듬뿍한 꽃들을 내밀고 있더라. 입술연지처럼 고운 꽃을. 지난겨울 동치미가 먹고 싶었나 캥캥 울던 고라니도 간데없고 외따롭게 지붕을 인 암자엔 노승의 기침소리만 뎅그렇다. 같이 나들이한 친구가 “나 절에 들어가서 살까?” 실없는 소리를 했다. 하지만 절집도 장기 투숙자는 골라서 받는다. 또 행자스님이라도 아무나 받는 게 아니지. 피식하면 하는 소리가 ‘고향에 내려가서 살겠다, 절에 들어가 살고프다’ 어쩐다 하지만 그게 말만큼 쉽나. 만만한 게 절집이다. 정치인이 선거운동을 하면서 “유권자 여러분. 일단 저를 실업자로 만들지만 말아주세요. 실업에서 구해 주시면 반드시 유권자 여러분에게 구직으로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능청도 좋아라. 그래놓고는 몰라요로 하세월이렷다.

구름이 비를 꾹 참고 있다. 꾸물꾸물하다. 전화기 저편에서 한 아이가 실업자 신세가 되었노라 하소연을 했다. 짐마차를 모는 근면한 노동자처럼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온 아이. 이제 뭘 할 거냐 물으니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다시 구직활동을 해보겠노라고. 그 아이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혼자 벌어 월세를 내고 햇반을 데워 먹으며 살아간다. 친구들 다 가는 대학도 가지 못했다. 복날에 술 취한 개도 “개장수들 다 나오라고 그래!” 허풍을 떤다고 하지. 이 아이는 항상 마음을 움츠리고 어깨도 굽어 있다. 목소리도 모기소리만 하다.

지금은 실업급여라도 있어 다행이어라. 전에는 당장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했고, 당일부터 알거지였다. 그러고 보면 시인은 정년도 뭣도 없고 좋아. 다만 시집이 팔리지 않는다는 점. 실업자 아닌 실업자라는 점. 누가 그랬다. 아직도 원고료 몇 푼이라도 받고 사는 작가가 몇이나 되겠냐고. 운 좋은 거라고. 쥐꼬리만 한 원고료를 한번은 동생 스님이 계시는 절집에 시주했다. 스님도 시를 쓴다. 실업자 시인들, 모두 원고료를 받는 세상이 속히 오기를 바라면서 살짝 밀어드렸다. 그 덕분인지 요즘 시가 솔솔 써진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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