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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일사일언] 방금 받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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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박상혁·CJ ENM 책임프로듀서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오래된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때 나는 시청률이 매우 저조한 어떤 프로그램을 연출하고 있었다. 힘들 게 버티던 어느 날, 갑자기 시청률이 확 올랐다. 봉사 활동을 하는 특집이었는데 시청률까지 좋게 나온 것이다. 우리도 이제 잘될 거라며 모두 힘을 냈다.

그런데 며칠 뒤, 인터넷에 촬영 목격담이란 글이 올라왔다. 그 글에는 우리 출연자들이 현장에서 욕설하고 쓰레기를 마구 버렸으며 방송 내용은 모두 조작이라는 것이었다. 실제 촬영 시간과 장소가 맞지 않는 '거짓 목격담'이었다. 하지만 글은 삽시간에 퍼졌다. 검색어에 오르고 기사가 쏟아졌다. 수많은 악플이 넘쳐났다. 해명 자료를 배포했지만, 흥분한 사람들은 우리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사이버 수사대에 문의했더니 신고하고 문제가 되는 글들을 가져오라고 했다. 프로그램 만들기도 바쁜 와중에 자료를 모으고 인터넷 화면을 캡처했다. 대충 모은 자료가 100쪽이 넘었다. 한 달쯤 지나서 담당 형사에게 연락이 왔다. 처음 글을 쓴 두 명을 찾았다고 했다. 중학교 2학년과 3학년 여학생이었다. 두 사람은 촬영 현장에 온 적이 없었다. 심지어 한 명은 미국에 사는 유학생이었다. 동시간대의 다른 프로그램을 좋아하는데 우리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올라가서 싫었다고 했다. 재미로 글을 썼는데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고 했다. "어린 학생들인데 굳이 처벌을 원하느냐"는 형사님의 심드렁한 질문에 그날 엄청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우리 프로그램은 이미 폐지가 결정돼 있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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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때 가짜 글을 진짜 뉴스로 전파했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먼저 사실 관계를 확인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증거 자료를 모으고 피해 상황을 증명하는 일들을 피해자가 직접 해야 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됐다. 가장 무서운 일은 그 당시 흥분해서 비난하던 수많은 사람은 어떤 처벌이나 경고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침 '방금 받은 글'이라고 쓰여 있는 카톡이 도착했다. 이번엔 또 누구일까.




[박상혁·CJ ENM 책임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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