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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전문기자 칼럼] 사립 유치원 설립에 30억, 대출금은 누가 갚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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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대출이나 사채 많은데 절반은 아직 빌린돈 다 못 갚아"

시설비 인정하거나 退路 주고 회계 투명성 강하게 요구해야

조선일보

김민철 선임기자


전국 3000여개 사립 유치원 단체인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가 개학 연기 투쟁을 했다가 정부의 강경 대응과 여론의 십자포화에 백기 투항했다. 한유총은 그간 현실에 맞지 않는다며 거부해온 국가관리회계시스템(에듀파인) 도입도 100% 수용했다. 그럼에도 서울교육청의 설립 허가 취소, 공정거래위 조사, 검찰의 압수 수색 등 정부의 전방위 압박에 그야말로 사면초가 상황이다.

사립 유치원들이 유아들을 볼모로 휴업이나 개학 연기 등을 감행하는 것은 도를 넘은 행동이다. 아무리 억울하더라도 아이를 맡길 데 없는 학부모 애간장을 태우는 방식으로는 절대 국민 동의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사립 유치원들은 왜 엄청난 비난을 받으면서도 기존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일까. 지금도 사립 유치원 관계자들은 식식거리며 억울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사립 유치원과 정부 주장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부분은 사립 유치원의 '사유재산성' 인정 여부다. 예를 들면 이렇다. 한유총은 유치원 하나 설립하는 데 평균 30억원 정도가 든다고 했다. 그런데 재벌 아니고는 이 돈을 한꺼번에 마련할 수 없으니 은행에서 대출받거나 지인·친척한테 빌리는 경우가 많다. 30억원을 투자했다면 3% 은행 이자만 계산해도 월 750만원이다. 정부가 그동안 이 비용 마련을 묵인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오래 운영해 빚을 다 갚은 유치원은 모르지만, 특히 신설 유치원은 이 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한유총은 사립 유치원의 절반 정도는 아직 대출금을 다 상환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정부는 유치원 설립자가 자발적으로 시설·설비를 갖추고 사유재산을 유치원 교육에 제공한 만큼 시설 사용료를 따로 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시설 사용료를 인정하지 않는 사립 중·고교와 형평성 등을 고려해봐도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부는 그동안 급팽창하는 교육·보육 수요를 국공립으로 대지 못하자 사립 유치원 설립을 장려해왔다. 현재 전체 유치원의 75%는 사립 유치원이다. 한유총은 "처음 유치원을 지을 때 어떠한 사유재산성도, 시설 사용료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으면 아무도 유치원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정부가 일종의 '신의칙'을 어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비슷한 조건인 어린이집은 임대료를 인정해 주면서 유치원은 인정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라고 했다. 더불어민주당의 4선 오제세 의원도 페이스북 등을 통해 "개인이 투자한 건립 비용이나 시설 비용을 주지 않기 때문에 사립 유치원들이 다 망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라며 "투자한 건물과 시설에 대해선 국가가 보상해 주는 것이 맞는다"고 주장했었다.

정부 의도가 처음엔 좀 모호했더라도 지금은 아무런 대가 없이 순수 교육 사업에 자기 재산을 제공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럴 의도가 없는 사람은 나갈 기회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정부는 앞으로 유치원 폐원 시 학부모 3분의 2 이상 동의를 받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의 유아교육법 시행령 개정안을 고시했다. 한유총은 3분의 2 이상 동의를 어떻게 받느냐며 사실상 폐업이나 전원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제도라고 반발하고 있다.

어쩌면 유치원 시설이 사유재산이냐 공적 자산이냐, 유치원 설립자가 개인사업자냐 교육자냐를 따지는 것은 부차적일 수 있다. 정부가 실제로 발생하는 설립 비용을 회계 처리할 수 있는 방안을, 적어도 아직 시설비를 다 상환하지 못한 유치원은 합법적으로 갚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상식일 것 같다. 또 지금 조건으로 더 이상 유치원을 운영할 의향이 없는 사람들은 유치원이 아닌 다른 일을 할 수 있도록 퇴로를 열어주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야 남은 쟁점 중 하나인 '유치원 3법'에 대한 타협 가능성도 높아질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퇴로까지 막고 사법 기관을 총동원해 압박만 하면 또 다른 분란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민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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