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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64] '祭政一致' 사회의 족장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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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청동방울(팔주령), 국보 143호, 국립광주박물관.


1971년 12월 24일 국립박물관 윤무병 학예관과 문화재연구소 조유전 학예사는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할 시점임에도 전남 화순 대곡리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나흘 전 출장길에 전남도청을 찾았던 조 학예사가 그곳에서 동검, 청동거울, 청동방울 등 깜짝 놀랄 만한 유물 11점을 확인하곤 윤 학예관과 함께 긴급 발굴에 나선 것이다.

자초지종을 확인하던 조 학예사는 하마터면 '국보급 유물'이 영영 사라질 뻔했다는 이야기를 듣곤 일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해 여름 동네 주민이 집 둘레에 배수로를 파던 중 땅속에서 여러 점의 유물을 발견해 보관하다가 엿장수에게 넘겼으나 다행히도 엿장수가 그것이 유물임을 알아보고 신고했던 것이다.

유물이 발견된 곳은 영산강 상류의 넓은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였다. 윤 학예관과 조 학예사가 교란된 흙을 제거하자 곧이어 무덤구덩이의 윤곽이 드러났고 그 속에서 큼지막한 목관 조각이 발견됐지만 기대했던 유물은 더 이상 출토되지 않았다. 엿장수가 신고한 청동기는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를 잘 보여주는 대표 유물로 인정받아 이듬해 3월 국보로 지정됐다.

2008년 2월 국립광주박물관 연구원들은 대곡리 무덤에 대한 재발굴에 나섰다. 좋은 사진을 촬영해 활용하겠다는 소박한 목표를 세운 다음 폐가로 변한 민가의 일부를 헐어내고 발굴을 시작한 것이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민가 아래에 묻혀 있어 조사하지 못했던 곳을 발굴할 수 있었고 남아 있던 흙 속에서 동검 2점을 새로이 찾아냈다.

학계에선 이 무덤 주인공이 기원전 4~3세기 무렵 청동제 무기를 기반으로 위세를 떨치던 족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청동거울이나 청동방울 등을 이용해 신비로운 능력을 보여주며 제사장 역할을 함께 수행한 인물이라 추정했다. 마을 주민과 엿장수의 손을 거쳐 가까스로 국민 모두의 국보로 거듭난 대곡리 청동기는 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한 페이지를 채워주며 지금도 여전히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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