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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서소문 포럼] 보수는 진보를 따라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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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채병건 국제외교안보팀장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김정은 수석 대변인’ 발언은 보수층에선 ‘통쾌 마케팅’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국민의 입은 틀어 막혔고 국정은 거꾸로 가고 있다고 속앓이를 해온 이들에겐 그간 들어보지 못했던 시원한 사이다 발언이다. 그런데 청와대나 민주당 쪽에선 분노를 유발하는 ‘모욕 마케팅’이다. 현 정부 충성파들에겐 뭔가 역공 거리를 반드시 찾아내지 않으면 속이 더부룩해 잠을 이루기 어려운 고구마 발언이다.

통쾌 마케팅이건 모욕 마케팅이건 감정선을 건드리는 직설적 표현은 지지층 결집에 대단히 효과적이다. 이 분야의 권위자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당 내건 당 바깥이건 경쟁자들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작명의 달인이었다. 공화당의 대선후보 경선전 때 아버지 부시와 형 부시에 비해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를 받던 젭 부시를 ‘원기부족 부시’로 불렀다. 공화당 후보 중 홍일점으로 주목받던 칼리 피오리나 전 휴렛팩커드 최고경영자(CEO를 향해선 ‘못생긴 얼굴’이라고 조롱했다. 대선에서 만난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에겐 ‘사기꾼 힐러리’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워싱턴 정치를 혐오했던 트럼프 충성층에겐 속이 뚫리는 발언이었지만 트럼프 반대층의 정서적 거부감도 역시 커졌다. 말은 말을 부른다. 트럼프 대통령이 틈만 나면 ‘포카혼타스’라고 조롱했던 이가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상원의원이다. 워런은 지난달 2020년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엔 자유인이 아닐 수도 있다”고 격한 말을 꺼냈다. 반트럼프 진영의 선두에 서기 위한 지지층 결집 전략이다.

정치는 인간의 본성을 뛰어넘어 하늘 위를 걸을 수 없다. 통쾌는 반대쪽에선 분노를 부르고 이는 앙심으로 누적된다. 그런 와중에 나라는 더 쪼개진다.

‘김정은의 수석 대변인’은 보수층에겐 시원하겠으나 대한민국엔 보수만 있는 게 아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야당인 민주당에서 귀태(鬼胎)라는 괴기스런 단어가 등장하고, 현직 대통령을 쥐와 닭에 비교하며 키득거리는 댓글이 온라인 공간을 도배할 때 보수층의 거부감은 더욱 단단해졌다. 지금 아마도 문재인 정부 지지자들 사이에선 똑같은 심리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수석 대변인 발언의 진짜 문제는 우리가 냉철하게 따져야 할 판단의 영역을 색깔의 영역으로 바꿀 수 있다는 데 있다.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한반도는 다시 기로에 섰다. 이번엔 평양만 아니라 백악관도 벼랑끝 전술을 구사할 태세가 돼 있어 그 엄중함은 과거와 다르다. 이런 상황까지 오는 데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중재자를 자처했던 우리 정부에도 문제가 있었다. 무엇보다 백악관의 속내를 정확히 간파하지 못했던 정부의 순진한 낙관주의가 문제였다. 문재인 정부가 중재자로 나섰다면 ‘김정은 대변인’ 역할을 하는 게 불가피했다. 단 백악관을 향해 ‘김정은 대변인’을 했으면 반대로 평양을 향해선 ‘트럼프 대변인’ 역할을 제대로 해야 했다. 북·미 협상의 키를 쥐고 있는 주인공은 트럼프인데 예측불허 협상가의 속내를 정확히 읽은 뒤 평양도 여기에 맞춰 하노이 보따리의 내용물을 더 채워와야 한다고 설득해야 했다. 상황이 이럴진대 정당 대변인의 논평도 아닌 상징성 충만한 원내대표의 국회 연설에서 작심하고 발언하면 이건 정치적 공방을 유도하는 게 된다.

한국당은 ‘수석 대변인’ 발언으로 ‘한 방’을 날렸다고 자평하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원래 이런 감정을 자극하는 말의 정치는 진보의 무기이지 보수의 특기가 아니다. 분노해서 투표장으로 향하는 건 진보 지지층이고, 보수 지지층은 불안해서 투표장으로 향한다. 보수는 생태적으로 분노를 결집시키는 행태를 불편해한다. 보수는 진보를 따라 하지 않는다.

채병건 국제외교안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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