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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세상읽기]‘표현의 자유’가 알려주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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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와 인격권. 이 둘은 상충하면서 서로 보완하는 관계를 가집니다. 법원은 언론의 힘이 약했던 1980년대까지 언론에 힘을 실어주는 판결을 했습니다. 서울 올림픽 후로 언론 시장이 커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무리한 보도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1990년대부터는 인격권 보호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 국가 운명에까지 영향을 끼칠 공론의 장이나 공적인 존재에 대해서는 철저한 검증을 위해 ‘악의적이거나 현저히 상당성을 잃은 공격이 아닌 한’ 책임을 면하게 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때 대법원 판결에 표현의 자유에는 ‘숨 쉴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이 등장합니다. 표현의 자유에 뒤따를 수밖에 없는 위축 효과를 없애려는 배려입니다. 역사는 언로(言路)를 터서 보장하고 시민과 언론에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는 이유를 우리에게 꾸준히 암시해 왔습니다.

경향신문

1950년대 미국에 반(反)공산당 기류가 정국을 휘감았습니다. 공화당 상원의원 매카시가 미국 연방정부 국무부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선언한 후의 일입니다. 사실 그때까지 미국에 우리가 알고 있는 온전한 표현의 자유는 없었습니다. 1960년대 워런 대법원장 시절로 불리던 시기에 접어들며 미국 연방대법원은 현실적 악의를 증명하지 못하면 언론은 면책된다고 선언합니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미국 언론은 날개를 펼칩니다. 현실적 악의론을 선언한 뉴욕타임스 판결이 1964년 선고됐습니다. 그때부터 딱 10년 후에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 위기에 몰리며 퇴임합니다. 대통령과 그 측근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언론의 지속적인 보도가 이어지면서 언론이 민주사회의 파수꾼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 역시 비슷한 길을 걷습니다. 2002년을 전후하여 대법원 판결에 그 전까지 볼 수 없었던 표현들이 속속 등장합니다. ‘숨 쉴 공간’ ‘위축 효과’처럼 사상의 자유 시장을 염두에 둔 표현들이 판결에 등장합니다. 무척 기뻤습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30년 넘는 세월 동안 우리는 ‘숨 쉴 공간’을 찾아 숨 가쁘게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4년 정도 지난 2016년에 현직 대통령과 측근의 비리를 알리는 보도가 고개를 들었고, 언론은 시민들을 광화문광장으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이처럼 민주사회를 지탱하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표현의 자유는 공적 인물을 희화하거나 논평할 자유도 포함합니다. 희화와 논평에는 때때로 모욕적인 표현, 불쾌한 표현이 섞일 수 있습니다. 대처하는 방식을 보면 세 가지 중 하나 같습니다. 외면하거나, 웃어넘기거나, 화를 내거나. 대중은 공적 인물에 대해 이 가운데 어떤 반응을 기대할까요?

“정치 만평은 공격 무기이자, 냉소와 조소와 야유를 위한 무기이다. 만평이 어떤 정치가의 등을 두드려 칭찬하고자 하는 때에는 거의 효과가 없다. 보통은 벌침과 같은 때에 환영받고, 항상 상당 부분 논란을 야기한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1988년 허슬러지 사건 판결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허슬러지는 광고 패러디라는 이름으로 저명한 인물을 상대로 심각한 모욕 표현을 합니다. 하지만 판결은 대중이 저급한 패러디 광고를 진실로 받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전제합니다. 정치 풍자가 자리 잡은 사회에서는 누구라도 시원하게 한 번 웃어버리고 만다는 뜻입니다.

공격 대상과 그 측근에게는 풍자나 논평을 외면하거나 같이 웃어버리는 것이 현명한 대처입니다.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대중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요새는 위축되기보다는 의아해할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닙니다. 집단 인식을 가진 대중이 공적 인물보다 더 현명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도 화가 난다면 허슬러지 광고에 나온 말을 새겨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패러디입니다.”

함석천 |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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