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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공감세상] 페미니즘 공부를 권한다 / 김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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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민식
<문화방송>(MBC) 드라마 피디


가난한 외모 탓에 20대에 연애에서 숱한 좌절을 겪었다. 대학 신입생 시절, 소개팅 미팅 과팅을 합해 스무번 연속 차인 것은 충격이었다. 연애가 너무 하고 싶었다. 책을 찾아 읽으며 대화를 잘하는 법에 대해 공부했다. 가장 좋은 화법은 ‘입을 다물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었다. 연애에서는 말을 잘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 훨씬 유용했다.

1995년에 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에 들어갔을 때 입학 동기 40명 중 남자는 6명뿐이었다. 언어감각도 뛰어나고, 기억력도 좋은 여학생들이 성적 상위권을 차지했다. 90년대 후반에 이미 ‘여성 상위 시대’의 도래를 온몸으로 느끼고, 페미니스트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보다 똑똑한 여자들이 이렇게 많은데, 경쟁하는 것보다 협업하는 게 나을 것이다. 나보다 똑똑한 후배와 결혼했고, 지금 아내의 연봉은 나보다 훨씬 더 높다. 나는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능력을 두고 아내와 경쟁하지 않는다. 나보다 잘 버는 사람을 배우자로 얻었으니, 진짜 승자는 나다.

2019년을 살아가는 20대 남성이라면 페미니즘을 공부할 것 같다. 비혼을 선택하는 여성이 늘어난다는 건 앞으로 갈수록 장가가기 어렵다는 뜻이다. 여성의 말을 귀담아듣고, 그들의 입장을 전향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에게 짝짓기의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여성들이 놓인 상황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이들에게 몇해 전 출간된 <아내 가뭄>(애너벨 크랩 지음/황금진 옮김/정희진 해제)이라는 책을 권한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결혼한 남성들은 미혼인 남성보다 평균적으로 약 15% 더 많이 번단다. 저자는 이를 ‘결혼 프리미엄’이라고 하는데, 아이가 생기면 이 프리미엄은 더 커진다. 25살 오스트레일리아 남성이 40년간 직장 생활을 한다면, 아이가 없는 경우 200만달러를 번다. 하지만 아이가 있다면 250만달러를 번다.

여성의 경우, 아이가 없는 여성은 역시 아이가 없는 남성과 비슷한 수준으로 190만달러를 번다. 하지만 아이가 있으면 소득은 130만달러로 떨어진다.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는 것이 여성 소득 증진에는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오스트레일리아 남성은 세계에서 가사 노동을 가장 열심히 하는 걸로 유명한데도 그렇다.

한국은 어떨까? 정희진은 <아내 가뭄> 책 머리의 해제 ‘여성이 아이를 낳지 않는 가장 큰 이유’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이를 낳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남성이 가사 노동을 절대로, 죽어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저출산은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아니다.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다.(기혼 부부의 출산율은 1.9명으로 두명을 육박한다.) 대한민국에는 결혼한 여성을 위한 인프라와 사회적 존중 문화가 전무하다.”

통역대학원을 졸업한 지 20년이 흘렀다. 학교에서 본 똑똑한 여자 동기들이, 지금은 전업주부가 되어 있거나 간간이 시간제로 일한다. 남자 동기들은 대기업의 상무가 되거나 금융회사의 임원이 되었다. 남자 동기들은 아내를 얻은 덕에 일에 전력을 다하고 능력을 펼쳐 보일 수 있었다. 똑똑한 여자 동기들에게는 아내가 없었다. 누군가의 아내가 되면서 그들은 자아실현의 기회를 잃었다. 모든 사회적 불평등은 가사 노동에서 출발한다.

요즘 나는 늦둥이 딸 키우는 재미에 폭 빠져 산다. <한겨레> 베이비트리 지면에 1년 전까지 ‘김민식 피디의 통째로 육아’도 연재했다. 퇴직 후 꿈은 딸들 곁에서 살며 손주를 돌봐주는 것인데 가끔은 고민이 된다. 요즘처럼 결혼, 출산, 육아가 힘든 시절에 딸에게 엄마 되기를 권할 수 있을까?

기회가 될 때마다 남자들에게 페미니스트가 되자고 이야기하고 다닌다. 페미니즘의 시작은 가사 노동의 분담이다. 집에서 실천하는 민주주의 운동이다. 페미니스트가 늘어나고, 가사의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질 때, 내 꿈도 이뤄질 것이다. 페미니즘을 알리는 것이 내 딸들의 결혼 확률을 높이는 길이고, 손주를 얻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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