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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경청과 공감, 초심을 돌이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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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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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석우 변호사의 법률 이야기-99] 조사를 마친 의뢰인과 함께 정문을 나선 시간이 밤 12시였다. 긴 하루였다. 6~7년 전 일을 참으로 촘촘히 묻는다. 공기업에서 정년을 마치고 잠시 쉬다가 예전 경험을 살려 다시 일을 시작했다. 특수목적법인으로 흔히 SPC라고 부르는 곳에서다. 애초 입사할 때부터 한정된 임무만 수행할 목적으로 회사에 들어갔다. 몇 개월 후 대표로 취임했지만 하는 일이나 급여에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허울뿐인 대표였지 그 기업에 들어간 목적이나 SPC라는 법인의 성격상 제대로 된 대표일 리가 만무했다.

수사기관이 의심할 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해명이 가능하다고 봤다. 잘하면 초반에 혐의를 벗을 수 있겠거니 나름 희망을 가지고 수사기관의 문턱을 넘었다. 그러나 아뿔싸, 누구라도 의혹을 제기할 만한 자금 집행에 결재를 했다는 것이다. 조사자가 조근조근하게 물어오는 신문사항들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많은 기초조사와 관련자들 진술을 확보한 듯싶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무 가혹하다. 불과 한 달 전의 일도 잘 알지 못할 사항에 대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묻는다면 누가 상세히 답변할 수 있으랴.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 진술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모르는 일이다'고 답변할 수밖에 없는 일 아닌가. 더구나 우리 의뢰인은 제대로 된 권한, 특히 자금 집행 권한이 없던 특수목적법인의 대표였고, 애초 입사 시부터 대표가 아닌 특정 업무에 한정해서 영입되어 그 임무만을 수행하던 분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 공이 우리에게 넘어왔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가 유리한 사실관계를 정리해야 하고 그 사실에 부합되는 유리한 증거를 마련해야 한다. '무죄추정의 원칙'이니 '유죄의 입증책임은 검사에게 있다'는 원칙만 믿어서는 안 될 상황이다. 그러려면 6~7년 전 일을 어떻게 해서든 복기해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오후에 만났으면 싶다는 연락이 왔다. 밀린 서면을 폭풍 작성하던 때였다. 오늘을 넘겨서는 안 될 서면들이 하필 그날 많이 몰렸다. 약속 시간에 의뢰인은 자신의 심경을 담담히 얘기하신다. 당연히 어제의 조사에 걱정이 많으시다. 그러나 이 사건은 분명 헤쳐 나갈 만한 사건이다. 다만 워낙 오래전 일이라 우리도 사실관계 파악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게 맹점이고 기억을 최대한 살려내야 하는 게 관건이라 말씀 드렸다. 아직 정리되지 않았지만 최대한 기억을 환기할 만한 자료를 찾아보자고 했고, 머릿속에 짚이는 대로 몇 가지 자료를 언급했다. 초점이 다르긴 하지만 동일한 영역에 대해 다른 수사기관에서 조사가 있었고 혐의까지 벗은 적이 있으니 그 자료를 구해보자고 말씀을 드렸다.

그런데 그 과정에 평소의 룰(Rule)을 넘고 말았다. 답답한 심경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구하는 의뢰인께 충분히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서면 작성의 압박에 시달리던 도중이어서였을까. 아니면 현재 상황에 대한 의견과 준비해야 할 사항들을 얼른 전달 드려야겠다는 의욕이 앞서서였을까. 의뢰인의 말을 도중에 끊고 내 말을 앞서서 말하는 우(愚)를 범했다. 의뢰인께서 따끔하게 질책을 하신다. 의뢰인의 말을 경청하고 그곳에 담겨 있는 억울함과 안타까움에 공감하자는 다짐이 변호사로서 초심이었다. 꼬여 있는 사건이면 사건일수록 의뢰인의 말에서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고 늘 후배들에게 강조하던 말이 아니던가.

지난 며칠간 의뢰인의 따끔한 말이 가슴 깊이 박혀 있었다. 초반 상담 내용과 지난 조사 시의 답변 내용에 이때 들었던 이야기들을 며칠째 붙들었다. 여기에 인터넷에 공개된 자료들과 판례들을 보태니 답이 보일 듯싶다. '경청 → 수용 → 공감'의 커뮤니케이션은 사건 내용의 파악에 있어서도 필수이지만 의뢰인으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서도 필수다. 다른 경우에도 그러하듯 말이다. 기본을 잠시 잊었다.

[마석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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