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9 (일)

“신처럼 떠받드는…식민지 조선에서 출발한 ‘전사자 숭배’문화”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전쟁과 희생’ 펴낸 강인철 한신대 교수

경향신문

최근 <전쟁과 희생>을 펴낸 강인철 한신대 교수는 지난 19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사회적 약자나 역사의 희생자에 대한 부채의식, 사회진보, 민주화에 기여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집필에 나선다”고 말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은 전사자를 ‘숭배’하는 나라다. 숭배는 추모와 다르다. 단순하게 전사자의 명복을 비는 것이 아니다. 전사자는 한국에서 ‘수호신’이 된다.

강인철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58)는 최근 출간한 <전쟁과 희생>(역사비평사)에서 한국의 전사자 숭배가 형성되고 변천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강 교수는 현대 한국 전사자 숭배의 기원을 ‘식민지 조선’에서 찾았다. 고도로 발달된 전사자 숭배 시스템을 만들어냈던 군국주의 일본의 영향이 의례, 묘, 기념시설 등 이른바 ‘전사자 숭배의 트로이카’에서 고스란히 확인된다.

강 교수는 올해 들어서만 3권의 책을 냈다. <전쟁과 희생>과 비슷한 시기에 <시민종교의 탄생>과 <경합하는 시민종교들>(이상 성균관대학교 출판부)을 출간했다. 3권 모두 500쪽이 넘는다. 강 교수는 3권을 묶어 ‘시민종교 3부작’이란 이름을 붙였다. 내년에는 4부에 해당하는 책을 또 낼 작정이다. 지난 19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강 교수를 만났다.

경향신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유일신 전통이 강한 지역에선

순교자·애국 영웅으로 추앙

조상숭배 전통 강한 동아시아선

호국신·군신으로 떠받들어 ‘대조’


- 한국 또는 동아시아의 ‘전사자 숭배’가 미국, 유럽 등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

“전사자 숭배에서 발견되는 동아시아의 특성은 ‘전사자의 신격화’ 그리고 ‘촘촘하고 다중적인 영적 안전망’, 이 두 가지로 압축된다. ‘영적 안전망’은 내가 창안한 개념이다. 죽은 이들을 원혼이 될 여러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사후 복지’를 극대화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들을 가리킨다. 이런 특성들은 동아시아에서 더욱 강력한 전사자 숭배가 가능했던 비결이기도 했다. 전사자의 신격화는 유일신 전통이 강한 지역에선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전사자를 순교자나 애국 영웅으로 추앙할지언정 호국신이나 군신으로 떠받들지 않는다. 전사자 신격화는 조상숭배 전통이 강한 동아시아 사회에서 조상신 승화의 기제가 작용한 결과다. 주로 죽음 의례와 공적인 호명을 통해 전사자들의 정체성과 지위를 ‘가문의 조상신’마저 초월하는 ‘민족의 조상신’으로 격상시키는 게 이 기제의 핵심이다. ‘촘촘한 영적 안전망’으로 대표되는 전사자 거처의 다중성과 다양성도 있다. 유럽과 북미에서는 전사자들을 집단적으로 매장한 군묘지가 숭배의 ‘유일한’ 장소다.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군묘지 말고도 다양한 형태의 숭배 장소들이 만들어진다. 육신을 안치한 장소뿐 아니라, 혼을 안치한 장소들을 별도로 만드는 것이다. 일본은 전사자의 육신을 안치한 군용묘지와 충령탑과 불교 사찰, 그리고 전사자의 혼을 안치한 야스쿠니신사와 호국신사와 충혼비 등 모두 여섯 가지 전사자 거처를 만들어냈다. 이런 촘촘하고도 두터운 영적 안전망에 대한 믿음이 일본인 병사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상당히 완화시켜주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일본보다는 단순하지만, 한국 역시 전사자의 육신을 안치한 군묘지와 불교 사찰, 그리고 전사자의 혼을 안치한 유교식 사당과 충혼탑·현충탑 등을 보유하고 있다.”

- 한국에서 정치인들이 때마다 국립현충원 참배를 하는 것도 관행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국립묘지가 처음 문을 연 1950년대에는 ‘무연고자 묘지’ 이미지가 강했다. 유족에게 그다지 인기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전사자는 유가족이 고향으로 옮겨 매장하는 ‘원심이동’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1957년 4월 유연고 전사자들이 처음 안장되기 시작한 이래, 국립묘지로 이장해오는 유연고 전사자 숫자가 빠르게 늘어났다. ‘무연고자 묘지’라는 부정적 이미지는 점점 희석됐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1965년 7월 이곳에 묻힘으로써, 국립묘지는 무연고자 묘지 이미지와 완전히 결별했다. 1966년 11월 미국 린든 존슨 대통령을 필두로 196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을 방문하는 국빈(國賓)과 주요 인사들의 필수적인 방문지가 됐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국립묘지는 상징정치를 위한 최적의 무대, 나아가 시민종교의 최고 성지이자 최고 신전으로 거듭났다. 국가의 수호신이 몰려 있어 다른 공간은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위상을 갖게 됐다. 정치인들은 국가수호신들의 항구적인 거처인 특이한 장소성과 그에 부수된 위엄(威嚴), 국가의 최고 성지·신전으로서의 위광(威光)을 최대한 활용하려 하고 있다.”

- 전사자 숭배는 국가주의의 도구로 보이지만, 유족 입장에서 보면 희생에 대한 보상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그렇다. 유족들이 그런 긍정적인 보상의 감정을 갖게 될 때 일본학자 다카하시 데쓰야(高橋哲哉)가 제시한 ‘감정의 연금술’이 작동하게 된다. 감정의 연금술은 국가의례를 통해 전사자 유족의 슬프고 불행한 감정을 기쁘고 행복한 감정으로 변화시키는 감정 통제 기술을 가리킨다. 그러나 감정의 연금술이 항시 제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니다. 성가정(聖家庭)의 창출과 감정의 연금술이 체제의 핵심 지지 세력을 만들어내기는 하나, 그 과정이 성공적이지 못할 경우에는 성가정들이 오히려 체제의 아킬레스건 내지 균열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특히 성가정에 대한 국가의 예우가 말뿐인 것에 그칠 때, 그래서 예컨대 성가정의 평균적인 경제형편이 일반가정의 그것에도 턱없이 미치지 못할 때, 감정의 연금술은 거의 효력을 잃고 말 것이다.”

국가, 아군 전사자에만 ‘숭배’로

세월호·김용균씨 등 ‘기념’으로


- 똑같은 희생자지만 민주화운동이나 국가폭력, 사고의 희생자 등은 숭배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국가는 전쟁으로 인한 죽음에 대해 고도로 차별적인 대응을 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전사자의 신원(身元)이 누구인가에 달려 있다. 국가는 아군 전사자에 대해서는 ‘전사자 숭배’로, 적군 전사자와 민간인 사망자에 대해서는 재난 사망자와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사자의 기술화’ 차원에서 대응한다. ‘망각된 전쟁’의 전사자들, 대표적으로 태평양전쟁의 조선인 전사자들(군인, 노동자, 위안부), 그리고 (2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 일본과 같은) 패전국의 군인 전사자들도 대부분 전사자 숭배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박종철이나 이한열은 예외지만, 국가폭력과 국가범죄의 희생자·피해자들도 대체로 영웅화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나는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스러져간 무수한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물들을 ‘위험사회기념비’라고 명명한 바 있는데, 삼풍백화점·성수대교 붕괴사고 희생자,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희생자를 비롯하여, 세월호 희생자나 김용균씨 등이 바로 ‘위험사회기념’과 관련된 인물들이다. 이들 역시 기념될지언정 영웅시되지는 않는다. 위험사회기념물이나 국가폭력 희생자 기념물을 지배하는 가치는 탈권위주의, 연민, 해원, 상생, 명예회복 등이다. 이런 기념물들은 대체로 ‘슬픈 기념비’여서 성격상 ‘반성문’ ‘대안적인 기념문화’에 보다 가까울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기념문화의 문법이 ‘나를 본받아 이를 행하라’는 것이었다면, 대안적인 기념문화의 문법은 ‘다시는 되풀이되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전통적 기념문화의 문법이 ‘유사 행위의 영속적 반복’을 추구한다면, 대안적 기념문화의 문법은 ‘재발 및 반복의 즉각 중지’를 추구한다.”

- 1부 격인 ‘시민종교’에서 3부 격인 ‘전쟁과 희생’으로 선뜻 이어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3부작을 생각했나.

“쓰다보니 3부작이 됐다. 한국연구재단에서 저술출판지원을 받아 <경합하는 시민종교들>이란 제목으로 시작했는데 <시민종교의 탄생>이 더 나왔다. 이 책 3부가 ‘전쟁과 시민종교’, 그중 14~15장이 ‘전사자 숭배’인데, 이걸 쓰다보니 너무 중요한 얘기더라. 할 얘기가 너무 많아져서 혼자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 그래서 시간이 길어지더라도, 힘들더라도 더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올해는 광주항쟁과 4·19혁명을 비교하는 작업을 추가해 내년쯤 4부를 출간하려 한다.”

- 책을 쓰기 위해 휴대전화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얼마나 도움이 되나.

“특별히 불편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익숙한 대로 사는 것뿐이다. (휴대전화가 없으니 연락을 받지 못해) 경조사를 비롯한 주요 삶의 일정을 못 챙기는 게 가장 미안한 일이다. 다행히 학술행사는 아직 e메일 공지가 보편적이다. 의도했던 바는 아니나, 결과적으로 외부 활동이 최소화되고 사회관계가 단순해져 일에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 단독저서만 15권을 냈다. 어떤 생각으로 이런 ‘안 팔리는’ 책을 내나.

“학술지에 실리는 논문은 너무 안 읽혀 논문의 문제의식이나 주장을 학문공동체 경계를 넘어 공론화하는 데 한계가 있다. 2004년에 첫 안식년을 보내면서 논문보다는 책 저술 중심으로 작업하기로 결심했다. 논문은 책 저술 과정의 부산물 정도다. 여기에 사회적 약자나 역사의 희생자들에 대한 부채의식과 사회진보, 인간화, 민주화에 기여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 또 부모님이 평안도·황해도 출신이다. 부친(강용준)은 반공포로 출신으로 나중에 ‘반공소설가’란 이름이 붙을 정도로 보수적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 조부모님, 가까운 혈족 거의 모두가 그렇다. 책쓰기는 이들을 보다 잘 이해하려는 애정 어린 노력의 일환이다.”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인기 무료만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