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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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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도들이 앞장 선 3·1 시위… 경성醫專만 32명 재판 회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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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 임시정부 100년] [3·1운동 막전막후] [3] 학생들이 3·1운동 주도하다

전교생 208명 중 15%가 기소된셈… 다른 전문학교 참가자의 2~3배

함남 북청 출신인 경성의전 1학년 이형원은 1919년 2월 28일 낮 학교 교실 난롯가에서 동급생 길영희의 전갈을 받았다. "내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조선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부르기로 했다. 같이 가자." 3월 1일은 토요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전교생이 등교해 수업과 실습을 진행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강의실 칠판에 누군가 '오후에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 모이자'며 휘갈겨 썼다.

이형원은 학교 친구 이강과 함께 탑골공원 집회에 참석했다. 동향(同鄕)인 이강은 경운동 하숙집에 함께 사는 사이였다. 두 사람은 종로, 남대문, 미국 영사관, 대한문을 오가는 시위 행렬에 함께했다. 3월 5일 남대문역에서 열린 집회에도 나갔다. 경찰에 체포된 이형원과 이강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스무 살 이형원은 법정에서 "조선 사람들이 독립을 희망한다는 걸 알리려고 시위운동을 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경성의전 학생들은 3·1운동 당시 탑골공원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1928년 탑골공원에서 기념촬영을 한 경성의전 졸업생들. 오른쪽은 1924년 경성의전 졸업앨범 머리말. 점선 뒷부분에 '(서모가) 등을 때려서 밖으로 쫓아낼 때 젖 먹던 힘을 모아 반항한 적몇 차례냐!!'고 썼다. 경성의전생들은 1921년 6월 일본인 교수의 민족 차별 발언에 동맹 휴학과 자퇴로 맞서는 등 항일 의식이 강했다. /서울대병원의학역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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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의전(서울대 의대 전신)은 서울 시내 학교 중 3·1운동 선두에 섰다. 재판에 회부된 숫자만 32명이다. 당시 경성의전 한국인 학생 208명의 15%다. 경성전수학교(14명), 경성공업전문학교(12명), 연희전문학교(11명) 같은 전문학교는 물론 고등보통학교 같은 중등학교보다 더 많은 숫자다. 1916년 설립된 경성의전은 조선총독부 산하 관립학교(4년제)였다. 일본인 학생들이 다닌 특별의학과에선 한국인 본과보다 해부학·조직학 등 수준 높은 교과목을 더 많이 가르쳤다. 수업도 일본어로 진행됐다. 학생들은 민족 차별 교육 탓에 불만이 쌓여갔다.

1919년 2월 파리강화회의와 도쿄 2·8 독립선언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문학교와 고보 등 중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를 계획했다. 김형기·한위건은 경성의전 대표였다. 경성의전은 3월 1일 탑골 시위 때부터 적극 참여했다. 재판에 회부된 경성의전생 32명 중 28명이 이날 시위에 나섰다. 2학년에 다니던 이익종도 동기생과 거리 시위에 참가했다. 이익종은 종로 4가 파출소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대를 고무하는 연설을 했다. 경찰을 상대로 "너는 왜 조선인이면서 만세를 부르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이익종은 징역 10개월형을 받았다.

3·1운동은 청년들의 삶을 뒤바꿨다. 이미륵은 상하이를 거쳐 독일로 망명해 작가가 됐고, 나창헌은 상해임시정부에 들어가 경무국장을 지냈다. 한위건은 임정 내무위원으로 활약하다 신간회 발기인을 지냈다. 파란만장한 의학도들의 삶이었다.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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