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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특파원 리포트] 3·1운동 기념식장의 日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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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하원 도쿄 특파원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3·1 독립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한·일 양국이 가파르게 대치하는 상황에서 생각나는 일본 외교관이다. 가나야마는 제2대 주한 일본 대사다. 일본 기업들로부터 포항제철 지원을 비롯한 경제 협력을 이끌어 낸 것이 업적으로 꼽힌다. 숨진 후에는 일본뿐만 아니라 파주시에도 그의 묘지가 만들어졌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은 그가 1969년 3·1운동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한·일 수교 54년의 역사에서 3·1절 행사에 등장한 유일한 일본 대사로 기록돼 있다. 1972년 퇴직한 가나야마는 '현해탄의 가교'라는 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과거 일본 관헌(官憲)이 자행한 것이 불행하고 나쁜 짓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일본 대사가 한국 국민의 감정을 자극할까 두려워서 언제까지나 3·1절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한국 정부와 국민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내가 당시 의의(意義) 깊은 기념식에 참석한 것은 매우 다행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런 가나야마 대사를 배려했다. 기념식장에서 일본에 대한 비판은 최소화했다. 그 대신 "3·1운동이 거국적 투쟁에도 불구하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은 국력이 약했기 때문"이라며 국력 배양에 힘쓰자고 강조했다.

한·일 양국이 서로 배려한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요즘 한·일 관계는 빠르게 후퇴하고 있다. 특히 일본에선 최근 3·1운동 100주년에 대해 우려하는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다. 일제 징용 배상 판결, 해상 군사 대치, 문희상 국회의장의 '일왕 사죄' 발언과 결합하면서 나타난 새로운 '공기(空氣)'다. 일본 측은 한국이 이번 3·1절을 계기로 반일(反日)로 치달을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의 말대로 일본 측이 '기미년 독립운동'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렇게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니다. 3·1운동은 침략국을 비난하기보다는 설득해서 양국이 동양 평화를 위해 함께 가자고 한 것이었다. "조선의 독립은 일본이 (침략자의)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떠받치는 자의 중책을 다하게 하는 것"이라는 선언문에 그 정신이 잘 요약돼 있다. 선언문 공약 3장은 "남(일본)을 배척하는 감정으로 그릇되게 달려 나가지 말라"고도 당부했다.

일본의 우려와는 달리 3·1운동 100주년은 그 정신을 제대로 살리면 한·일 관계의 새로운 분기점을 만들 수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일본의 정치인들이 50년 전 가나야마 대사의 결단을 한 번이라도 숙고해 보기를 간절히 바란다. 상대를 배척하기보다는 진심으로 일본을 설득해 함께하려 했던 3·1운동이 비단 일본에만 교훈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하원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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