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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독립견문록 ④난징] 항일무장 선봉 섰지만…폐허로 남은 의열단 훈련지 `톈닝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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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 독립견문록, 임정을 순례하다 ④ 난징 ◆

매일경제

중국 난징시의 톈닝사. 약산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3기생은 톈닝사에서 군사훈련을 받으며 독립 의지를 불태웠다. 한때 99.5칸짜리 거대한 도교 사원이던 톈닝사는 1970년대 문화대혁명 당시 불에 타거나 부서져 사라졌고, 현재 남겨진 건물도 새로 지은 건물이다. [난징 =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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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포장은커녕 이슬 서린 나뭇잎을 잘못 밟아 미끄러질까 한 걸음 떼기도 버거운 야산이었다. 로퍼 구두엔 이미 진흙이 잔뜩 묻었고, 멀리 민가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헐떡이며 산비탈을 오르니 겨우내 썩기 시작한 시든 나무에 걸린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톈닝사(天寧寺)'란 세 글자였다. 내려다보이는 저수지의 물결이 고요할 만큼 깊은 산속인 이곳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훈련소로 1919년 의열단을 창단해 투쟁한 약산 김원봉(1898~1958)이 새 길을 모색하며 세운 군사학교다.

"한글학자 김두봉 선생과 광복 후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김상덕 선생이 톈닝사에서 학생들을 교육했어요. 간부학교 졸업생들은 만주와 국내에 파견돼 일만(日滿·일제와 만주국) 요인 암살 등의 활동에 주력하다 상당수가 일제에 체포됐습니다." 동행한 홍소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자료실장이 톈닝사에서의 독립운동 활동을 소개하는 내내, 소중한 유적지보다 아득한 폐허란 단어가 어울릴 만큼 허물어졌다는 생각이 깊었다.

광복 후 월북해 오랜 시간 그늘에 가려졌지만 약산 김원봉은 독립 투지의 아이콘이었다. 영화 '암살'의 조승우 배우가 바로 약산을 연기했고, 영화 '밀정'에선 이병헌 배우가 맡은 정채산의 실제 모델이 약산이었다. 만주사변과 상하이사변으로 1930년대 세계 정세는 대한민국과 중국에 불리했기에 독립 투사에겐 '좌우(左右)'보다 '항일(抗日)'이란 명사가 우선이었다. 김원봉은 백범에게 독립운동 세력을 합치자고 제안했다. 정치 노선은 달라도 약산과 백범은 같은 길을 가던 민족 동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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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릉의 한가운데 플라타너스 두 그루가 하늘로 치솟아 있었고, 그 뒤로 낙엽과 이끼가 을씨년스러운 초라한 건물이 보였다. 폐허에 향 냄새가 진동하는, 다른 의미의 장관(壯觀)이었다. 청나라 시절의 석상이 부서진 채 뒹굴고 있었다. 1970년대 문화대혁명의 흔적이었다. 인근 주민 장 모씨에게 물으니 "초하룻날에 동네 주민들이 가끔 와서 기도 드리는 정도고 아무도 찾지 않는다. 한국에서만 학자들이 1년에 열 팀 정도 오는 것 같다"며 "톈닝사는 한때 99.5칸짜리 대규모 사찰이었는데 문화대혁명 때 모두 불탔다. 지금 건물은 새로 지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은 난징의 탕산에서 훈련을 받았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이육사 시인은 간부학교 1기 26명 중 한 명이었다. 2기는 55명, 3기는 44명이다. '저항 시인'으로 명성이 높지만 이육사는 투옥과 탈옥을 반복한 의열단의 핵심 멤버였다. 그의 시는 삶의 결정체였다. 이육사의 시 '절정'을 나직이 읊조리며 고개를 숙이고 톈닝사 갈라진 시멘트벽 틈에 미리 준비한 무궁화 조화(造花)를 한 송이 꽂았다.

난징에서 고물상으로 잠복한 백범은 이 시기에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와 연락을 취하며 군사행동을 모색했다. 엄항섭과 안공근이 외교에 집중하던 때였다. 중국 국민당원이기도 했던 박찬익의 소개로 백범은 장제스와 난징에서 만난다. '백범일지'엔 장제스와 나눈 필담(筆談)이 자세하다. "대폭동을 일으키겠다"는 백범의 제안에 장제스는 군대를 양성하자는 역(逆)제안 카드를 내민다.

"천황을 죽이면 천황이 또 있고, 대장을 죽이면 대장이 또 있지 않소? 장래 독립하려면 군인을 양성해야 하지 않겠소?"

백범은 난징에 잠복하는 한편, 뤄양에 옛 독립군과 청년들을 모집해 군사 육성에 집중했다. 주아이바오를 난징으로 데려와 부부 행세를 했고, 광둥 지역에서 온 고물상으로 위장했다. 정확한 지점은 확인되지 않으나 백범이 머문 위치는 회청교(淮淸橋) 인근이었다. 회청교 인근을 거닐며 백범의 흔적을 살폈다. 영상의 날씨에도 뼈가 시릴 듯이 으스스했다. 도로 중앙에 놓인 표지판이 없다면 어느 시골 마을의 허름한 석조 교각이라고 지나쳤을, 흔한 다리였다. 지금은 관광지여서 간판에 한국어가 더러 눈에 띄었으나 독립운동의 흔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리를 옮겨 난징의 항공열사공묘에 올랐다. 황해도 출신으로 1938년 중일전쟁 당시 공중에서 전사한 상위대장 전상국, 1945년 추락사고로 사망한 소위비행원 김원영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격추되거나 추락한 조종사들은 시체를 찾지 못하니, 독립운동에 뛰어든 항공열사들이 남기는 건 결국 이름뿐이라 했다. 주검도 없이 검은 비석에 새겨진 이름 석 자의 무게가 아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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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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